무엇이 내 것인가?

2007.08.20 01:10

bultasa Views:6819

내 것은 무엇인가? 명상(瞑想)의 자세로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불교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무엇이 내 것인가?, 내 것은 무엇인가?’를 화두(話頭)로 하여 관(觀)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의 가장 앞머리에 ’무엇이 내 것인가? 내 것은 무엇인가‘를 두고 이를 끊임없이 상기하며 그 의심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면서 그 의심에 대한 대답을 끝까지 구하기 위해 일념(一念)으로 집중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닦는다고 하여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참선(參禪)이라 하고, 좀 더 정확히는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합니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바라보는 선이라는 의미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선(禪)’이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고요하게 하여 천위(天位)에 오르게 되는 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위란 하느님의 위치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합쳐서 뜻을 해석해 보면, ‘간화선(看話禪)’이란 화두 이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오직 화두만을 바라보면서 일념(一念)으로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간파(看破)하였을 때 비로소 천위(天位)에 오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간화선’이란 의미가 이러하니, 여러분들께서 이제 ‘무엇이 내 것인가? 내 것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관하여 그 답을 구하여 천위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10분, 15분, 30분, 혹은 40분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진정 ‘내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찾게 됩니다. 결국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분별하여 버리게 되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서 하늘 높이 나르는 듯한 고요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이를 체험하면서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그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음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뛰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흐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라는 의심을 진지하게 탐구해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까지는 돈으로부터의 자유, 부인, 남편, 부모, 형제와 자녀로부터의 자유, 사회적 관습과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모두 ‘내’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의 나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밖으로부터의 자유를 구하려고 아무리 애를 쓰도 만족한 대답을 구할 수 있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참다운 자유는 ‘나’의 내면세계에서 나를 구속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이 내면세계의 구속을 인식하고 이를 타파함으로서 얻어지는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구속이란 나의 자존심,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나의 이기심(利己心), 선입견, 편견, 화냄 등 경험에서 오는 감정과 무지(無智) 등등 불교에서 말하는 업장(業障)에 의한 구속들입니다. 우리는 이 업장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업장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천위(天位)에 오르게 된 자유인을 불교적인 용어로 여래(如來)라고 부릅니다. 여래라 함은 이 우주상에 영생하는 존재로서 전지전능하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비유됩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전지전능하고 영생하는 여래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내재(內在)되어 있다가 업장이 소멸됨으로서 스스로 발현(發現)된다고 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여래장이 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부처인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많은 생명들에게 해로운 짓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업장(業障)이 두터운 탓입니다. 인류사회 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모든 생명들을 위해 이로운 일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부처로서 부처님의 능력으로 부처님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라, 사람들은 그들을 부처님을 공경하듯 공경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라도 미혹하면 중생이 되고, 중생이라도 이러한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은 곧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들은 허공처럼 넓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의 업장을 소멸케 하여 불도(佛道)에 들게 하는 법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을 위해 불법(佛法)을 펴는 것이니, 폭력적인 수단은 업장을 소멸시키기보다 가중시킴으로서 중생의 안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중생의 편에서 그들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그들의 영적인 안녕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라 하셨습니다. 현대사회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질문이 ‘무엇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라 봤습니다. 다행히 이 화두를 관하여 필경에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내 것’이 아닌 것을 위해 싸울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치를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남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이요, 진정한 나를 위함은 곧 남을 위함이 된다.’는 이치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무엇인가’를 10분, 15분, 20분, 30분 혹은 40분간 조석(朝夕)으로 관하는 습관을 드려, 참다운 자신을 깨닫고 천위에 올라, 남과 다투거나 투쟁하기보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모두가 하나 되어, 이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선두에 서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스님
2007.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