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2007.12.22 02:28

bultasa Views:6797 Recommend:1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요즈음은 ‘돈’이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사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하니 돈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돈이란 돈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사랑’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랑에는 남녀간의 사랑, 자녀와 부모와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항상 귀중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6․25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항에 처했을 때에 서로 살기위해서 그들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들이 없이도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요, 사랑도 아니다. 그러면 과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생명’이다. 나의 생명이 없이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이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말로 ‘목숨’이다. 그러면 목숨이 곧 생명인데 목숨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란 목을 드나드는 숨이다.

부처님께서는 ‘생명이란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셨다. 목에 숨이 드나들 때, 살았다고 하고 드나들지 못할 때 죽었다고 하니까 ‘생명이란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다섯 가지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물질, 느낌, 생각, 행위, 의식이다. 물질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즉 흙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감각(感覺), 느낌이다. 그러나 이 감각은 이기적인 욕망 충족에서 쾌락을 느끼는 기능이 강하여 착각에 빠지고 악습(惡習)에 물들어 호흡이 급해져 목숨을 재촉하고 사회적인 불안 요소가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숨속에는 흙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이 들어 있고, 우리는 그 기운들을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의식작용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숨이 급해진다, 더운 기운이 난다, 찬바람이 난다, 탁해진다, 갑갑하다, 냄새가 난다, 등등이 바로 이 의식작용인데, 숨이 끊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 의식작용이 멈추었다는 것이고, 이 의식작용이 멈추어진 것을 우리는 ‘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호흡지간에 있는 ‘나’가 무엇이냐? 나의 느낌과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나’는 무엇인가? 느낌과 생각이 내 몸만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내 몸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게 된다.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내 몸같이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고자 하는 사람은 민족과 국가를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 불교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도 불교가 곧 자기 자신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고 하는 몸의 한계는 나의 마음이 넓어지는 정도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작용은 지식과 경험에서 오는 의식적인 감각이라 그 한계가 있어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고 사는 것을 원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법칙을 깨닫고 보니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지수화풍은 바로 이 우주로부터 비롯되어 나와 인연되었을 때 태어났다고 하고,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는 것을 죽었다고 하는 것이니, 죽었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으셨고, 그 본래의 자리는 우주 그 자체라고 하셨다. 이러하니 이 몸이 곧 이 우주요, 이 우주가 곧 이 몸이니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태어나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죽는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마치 얼음을 나라고 하고 물을 우주에 비유할 때, 얼음이 언 것을 내가 태어났다고 하고 얼음이 녹은 것을 죽었다고 하는 것이나, 얼음이라고 물이 아닌 것이 아니니 물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얼음이 되었을 때, 나는 본래부터 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을 지각(知覺)이라 하고 그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부처님은 이 우주를 몸으로 하니 일체 중생을 당신의 몸으로 알고 그 몸을 위해 자비희사(慈悲喜捨)를 하셨다. 그리고 지각(智覺)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으면 지혜가 일어나 우주 법계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원융하고, 부족함이 없어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이다. 평화로운 세계란 자유가 충만한 세계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자유로운 법치(法治)주의, 자유로운 민주주의, 자유로운 시장경제주의이다.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고 평등하게 시행되는 사회공동체가 불교적 공동체이다.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함은 감각적인 사유로 통제나 독재, 몸싸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적 자유는 지각(智覺)적 자유이다. 깨달은 사람이 갖는 지혜로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비행이다. 혹 깨닫지 못하였으면 믿고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우주가 곧 나요, 내가 곧 이 우주인 것을. 너와 내가 하나이니 이 삶 자체가 자유요 평등이요, 극락세계인 것을. 그리고 이 법계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기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지혜로서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적 자유는 오류(誤謬)의 사슬에 구속되게 하고, 지각(智覺)적 자유는 우리를 오류의 물결에서 구제하여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상생(相生)의 길로 인도하고, 더 나아가 서로 함께 통하지 않음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일체 중생이 대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극락세계를 이루게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이다.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합장
2007.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