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관(死隨觀) - 죽음을 따라 한다는 뜻

2007.02.25 19:38

bultasa Views:7312

사수관(死隨觀)  - 죽음을 따라 한다는 뜻


사수관이란 죽음을 따라 관한다는 뜻이다. 이는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을 겸할 수 있는 관법이다. 사수관에는 나의 죽음을 관하는 방법과 다른 사람의 죽음을 관하는 방법이 있다. 우선 자기의 죽음을 관하는 법을 이 시간에 설하겠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라했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가게 되어 있는 몸이다. 살펴보면 가는 데는 두 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내 집에서 살다가 내 집에서 가는 예이고, 다른 하나는 양로원에 가 살다가 그 곳에서 가는 예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내 집에서 살다가 내 집에서 가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는 사람도 있고 뜻대로 되지 않아 양로원으로 가야하는 사람도 흔하다.

내 자신이 늙어 쇠약하여 졌다고 가정하여 놓고, 어떤 경우에 집에서 죽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 양로원으로 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아들 딸이 나를 양로원에 가야 한다고 양로원에 보냈다고 가정하였을 때,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노년에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면 죽을 때까지 몇 년씩 양로원에서 사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나라고해서 다를 바가 있겠는가?

우리는 오늘 양로원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사는 것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양로원 비용에 대한 빚을 지고 가는 것인가 아닌가 논의해 보고자 한다. 만약 삶의 가치도 없고 빚을 지고 간다는 결론이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으면 다음 생을 또 받는 법이니 빨리 가면 그만큼 빨리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빨리 가기 위해 곡기를 끊으면 배가 고파 먹고 싶은 욕심을 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식욕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은 욕심은 성격(性格)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성격은 지나간 세월동안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 정하여지는 것이다.

양로원에서 이와 같이 살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관하고, 자기가 양로원에 오게 된 이유를 관하고 그 이유의 이유, 그 이유의 이유 등을 세밀히 관하여 들어가면 어린 시절부터 자기에게 있었던 여러 가지 잘못들을 하나하나 깨치게 된다. 그들을 끊임없이 참회하여 과거에 지은 잘못을 모두 녹여버리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격이 무너진다.

그 성격이 무너지면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게 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배가 고프다는 생각, 먹고 싶다는 생각 등이 사라진다.

이 때 자기의 죽음을 관하면 모든 것이 가볍고 고요하면서도 편안하여지고, 몸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살기 위해 사는 생명에 대한 집착이 끊어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지니 편안해 지는 것이고, 기왕에 가야할 길이면 더 이상 고통 받지 말고 어서 빨리 가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과거에 지은 업장이 남아 있으면 자기의 성격이 그대로 있는 것이고, 그 성격에 의한 집착이 있는 한, 병으로 인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살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게 작용함으로 죽음이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즉 사수관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설명한 바는 사수관을 통해서 현재 내가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찾아 참회하여 자기의 그릇된 성품을 깨끗이 씻어버리면, 생명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 집착을 여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고요하고 편안함을 얻게 된다.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이치이다.

이와 같은 사수관을 통해서 자기의 그릇된 성품을 알게 되었으면 보시행을 함으로서 남에게 준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고, 계행을 잘 지키고 인욕(忍辱)하고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서 새로운 죄를 짓지 않고 나와 남을 위해 공덕을 쌓는 일을 부단히 함으로서 선정에 쉽게 들 수 있고 선정에 들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일어나는 법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것은 구부러진 나무를 보고 구부러진 나무라고 알고, 곧은 나무를 보고 곧은 나무라고 아는 것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이라 한다. 이런 눈을 혜안(慧眼)이라 한다. 불교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이렇게 쉬운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착한 사람을 보고 착하다고 알고 악한 사람을 보고 악하다고 아는 것이 혜안이다. 옳은 일을 옳다고 보고 그른 일을 그르다고 보는 것. 돈 벌 일을 보고 돈 벌 일이라고 알고, 돈 벌지 못할 일을 보고 돈 벌지 못할 일이라고 아는 것,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아는 것 등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모두 혜안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수행을 통해 자기를 보고, 자기의 그릇된 성품을 모두 녹여버리면 혜안이 열리게 된다고 부처님이 설하셨다. 그리고 진리를 보고 진리인 줄 아는 눈을 법안(法眼)이라 한다.


물은 구부러진 지형을 보고 구부러졌다고 탓하지 않고 흐르고, 곧으면 곧은 대로 불만 없이 지형 따라 흐르면서도 자기의 본성을 여의지 않고 모든 생명의 원천(源泉)이 되고, 공기도 미리 정해진 방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류 따라 다니면서도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된다. 이 이치를 법성게에서 “참된 성품은 지극히 미묘하여 자신의 성품을 따르지 않고 인연된 조건에 따른다.”고 했다.


2006. 5. 17.
대한불교 조계종 시카고 불타사 주지 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