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완전히 죽여라”의 의미

2007.02.2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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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완전히 죽여라”의 의미


내가 지금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것이 아닌가?

발이 아프면 걸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허리가 아파도, 심장 박동이 이상하거나, 소화가 안 되고, 혈압이 높아도, 간이나 콩팥이 나빠도 걸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리고 잠을 잘 자지 못해도, 숨쉬기가 어려워도, 밥을 잘 먹지 못해도 걸음을 걷기 어려워진다. 뿐만 아니라 골치가 아프거나 머리가 어지러워도 걷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러하니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하고 행복한 일인가?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 이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상(相)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不淨)한 일까지 해가며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나’라는 상(相)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명예라는 상에 집착하는 ‘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을 때 이유를 세우려들지 말고 즉시 그러한 ‘나’를 죽임으로서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힌 명예욕의 뿌리를 캐낼 수 있어야 한다.


선악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나’라는 상(相)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돈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내’가 있다. 이러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을 때, 이유를 세우려들지 말고 즉시 그러한 ‘나’를 죽임으로서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힌 돈을 좋아하는 뿌리까지 캐낼 수 있어야 한다.

부정(不淨)한 마음으로 이성(異性)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나’라는 상(相)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성(異性)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을 때 이유를 세우려들지 말고 즉시 그러한 ‘나’를 죽임으로서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힌 이성을 부정하게 좋아하는 뿌리를 캐낼 수 있어야 한다.

남이 나를 무시하는 말, 체면을 손상시키는 말을 나에게 했을 때 나는 화가 나 맞상대를 하든지 더 심한 욕을 하게 된다. 이 때 ‘나’라는 상(相)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내’가 너에게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상에 집착하는 ‘내’가 있다. 이러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을 때, 이유를 세우려들지 말고 무조건 그러한 ‘나’를 죽임으로서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는 우월감을 뿌리째 캐낼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용서 못하는 인색한 마음도 이와 같다.

사람이 발 자체만가지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불자(佛子)들은 이러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한다. 발로 걸으려면 신체 전체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이 유지되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때 걸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물, 태양, 산하대지 즉 우주 전체와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우리들 모두는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개체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니 행선(行禪)을 통해 이 관계를 체험하여 인연법을 깨치도록 노력해야한다.  


어떻게 하는 것을 죽인다고 하는가?

알다시피 죽어야 없어진다. 그러므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을 죽인다고 한다. 어떻게 완전히 없애버리는가?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악순환 즉 윤회고(輪回苦)를 면치 못한다.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즉시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야한다.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남으로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여러 가지 합리적인 수행을 하게 된다. 수행법에는 사수관(死隨觀), 자상관(自相觀), 행선(行禪), 참회기도, 3천배, 노동봉사, 재시(財施) 등 다양하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도 이루지 못한다면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나는 사람만이 죽일 수 있다.


완전히 죽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와 어떠한 관계에서도 능소(能所)가 일어나지 않을 때 ‘나를 완전히 죽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은 생멸심(生滅心)을 완전히 소멸하였다고 할 수 있고 불생불멸심(不生不滅心)을 성취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구와도, 어떠한 일에서도, 상대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리는 마음이 성숙되어서 부당한 상대적인 의식을 제압할 줄 알면 된다.

아무리 『반야심경』을 외우고 『천수경』을 암기하고 『금강경』을 해독(解讀)하며 탐진치를 소멸하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들은 마음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법(法)을 이해하는 것은 수행(修行)이 따를 때만이 가치가 있다.  


즉, 상(相)이 없는 마음이 ‘무조건 완전히 죽인 마음’이다.


2006년 8월20일
시카코 불타사 주시 현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