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第十七  (구경에는 내가 없다)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 燃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若有人 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如來 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 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 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 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 어떻게 응당히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강복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낼지니라. 내가 응당히 일체 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중생도 실로 멸도한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한 법도 없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수보리야, 만일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었다면 연등부처님이 곧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부처님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었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에 실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일체 법이 다 이 불법(佛法)이라고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일체법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함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사람 몸의 장대함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이 만일, ‘내가 마땅히 무량한 중생을 멸도했다’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일체 법은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다’고 설하시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토를 장엄하리라’고 말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무아(無我)의 법을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진실로 그를 보살이라 하느니라.”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 어떻게 응당히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강복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야한다. 내가 응당 일체 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중생도 실로 멸도한 자가 없다고 마음을 가져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이가 있다면 무슨 법에 의지하여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합니까."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할 마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일체 중생을 제도해서 다 성불하게 하고는 한 중생도 내가 제도한 자가 있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능소심(能所心)을 없앴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 없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없앴기 때문이며, 또한 ‘나’라는 견해를 없앴기 때문이다.

어떨 땐, 달이 하도 좋아서 창주 땅 지나가는 줄도 몰랐도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일념이 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중생을 제도 하였어도 제도 한 줄도 몰랐다.

만일 어떻게 머무는가 묻는다면 중(中)도 유(有)도 무(無)도 아니다. 머리엔 조그마한 풀도 덮은 것 없고,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고, 발로는 염부제(閻浮提: 사바세계) 밟지 않도다. 가늘기는 작은 먼지(허공) 쪼갠 것 같고, 가볍기는 나비가 날개 짓하는 것 같도다. 중생을 다 멸도 하되 멸도함 없는 것, 아니 이것이 바로 류(流)를 따르는 대장부로다.

제 이장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묻기를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하고 묻고, 제 삼장에서 부처님께서 항복받는 법으로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멸도하라고 하시고, 구류중생을 모두 멸도 하여 마쳤어도 실로 아무도 멸도를 받은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만약 멸도를 받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 4장에서 부처님께서 보살은 법에 대하여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하고 색이나 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바 없는 보시를 해야 한다고, 아직 사상(四相)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한 보살에게 무주상보시를 설하신다.

이 문구에서 우리는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  보리심을 발하였으나 무주상보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 17장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하고 묻고, 부처님께서 “아응멸도(我應滅度) 일체중생(一切衆生) 멸도일체중생이(滅度一切衆生已) 이무유일중생(而無有一衆生) 실멸도자(實滅度者)”라고 하시고, 만약 보살이 사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고 하신 것까지는 제 3장과 같은 논법을 쓰고 있어 제 3장과 제 17장이 같은 뜻인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 “실무유법(實無有法)”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라고 한 점에서 제 4장과 제 17장의 차이점을 세우고 있다. 이 문장에서는 사상(四相)이 없어야 함을 깨달은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을 때 어떠한 법에 마음을 머물고 그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수보리가 묻고,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멸도 하겠다는 마음에 머물고 일체중생을 멸도하고도 멸도 한 바 없도록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고 설하셨다. 왜냐하면 멸도한 중생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보살에게는 중생이 있다는 중생견(衆生見)이 있고, 중생을 멸도 하였다는 멸도견(滅度見)이 있기 때문에 아직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만약 중생이 있어 내가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나의 우월성을 내 세우는 짓이니 이는 곧 아상이요, 능히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음이니 이는 곧 인상이요, 열반을 가히 구하려 한다 하면 이는 중생의 공통된 마음이니 이는 곧 중생상이요, 열반을 가히 증득할 게 있다고 여기면 역시 자기의 우월성을 세우는 것이니, 이는 곧 수자상이 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한 법도 없는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기 때문이니라.


이 문장에서 실무유법(實無有法)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무유법(無有法)이라고 하지 않고 실무유법(實無有法)이라고 한 실(實)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 까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무유법(無有法)이라고 하는 것은 유법(有法)에 대한 대칭어이다.

유법(有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존재는 각각 존재하고 있다는 법이다. 예를 들면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내가 있고 내 부인이 있고 자녀들이 있다. 부인이 있고 남편이 있으니 서로 사랑하고 자녀들을 좋은 학군에서 잘 길러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려니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니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뛰어야 하는 고충이 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유법(有法)이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상에 대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유법(無有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은 너와 나는 원래 하나이니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 것이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 원래 뜻은 너와 나는 평등하게 서로 의지하여 공생하고 있으니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너와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이나 사람들은 너와 내가 없으니 부인도 없고 남편도 없고 딸도 없고 아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모두가 하나이니 분별심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의 손목 한번 잡을 일도 없고 자녀들의 학군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부부사이에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많은 애정을 표현하면서도 결국은 욕구 불만으로 이혼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자식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결국은 어떻게 되는 가를 보라. 부부사이의 사랑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조롭게 일어나는 것이며 자식은 자기의 지은 복에 따라 순조롭게 커가는 것은 마치 복숭아나무가 남의 힘을 빌이지 않아도 봄이 되면 저절로 싹을 티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니 봉숭아를 우리가 먹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숭아나무의 열매는 누구도 대신하여 맺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숭아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기를 기대할 수 없고 사과나무에서 배가 열리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정주영씨가 어린 시절 지내온 과정과 유사하다. 그리고 정주영씨가 자기의 자녀들을 당대에 가장 유명한 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게 하였지만 자기 아버지만한 자식이 없는 것과도 비유된다. 즉 각기 자기 그릇 따라 가는 것이니 그를 것이 없다는 것이 무유법(無有法)의 이치이다.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세우지 말고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 무유법(無有法)의 이치이다.

실무유법(實無有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아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자녀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위하여 내 자신을 희생하여 가면서 살아가다보니 삶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삶, 즉 돈을 벌기 위하여 사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곧 유법(有法)의 이치이고 결함인 것을 알게 되어 유법을 버리고 무유법(無有法)을 택하게 된다. 무유법을 택하고 보니 일체가 하나이니 내가 설 땅이 무너져 버린다. 유법의 사고방식으로 무유법을 대하니 막막한 것이다. 유법의 사고방식으로 무유법을 대하니 아내의 손목도 잡을 일이 없고 자녀들에 대한 염려도 할 것이 없다. 무유법에서는 모든 것은 저절로 자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무유법(無有法)을 설하실 때 이러한 극단적인 의미로 유법(有法)과 무유법(無有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법(有法)에 즉(則)해서 무유법(無有法)이 있고 무유법(無有法)에 즉하여 유법(有法)이 있는 것이지 이 양자가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라고 하는 것이 실무유법(實無有法)의 이치이다. 이는 곧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은 이치이다. 즉 사랑한다 사랑한다하면서 딴 짓을 하고 다니는 유법(有法)도 아니고 무관심이 나타날 정도의 무유법(無有法)도 아닌 중도(中道)로서 항상 실답고 여여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 실무유법이다. 내 것이 있으면서도 내 것이 없고, 내 것이 없으면서 내 것이 있는 이치이다. 돈이 내 호주머니에 있다고 하여 내 것이라고 낭비하는 법이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하여 굶어 죽는 사람 없다. 돈이 내 호주머니에 있지만 이것은 부처님의 돈이라고 생각할 때 있으면서도 있는 것이 아닌 이치이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부처님의 돈이라고 생각하면 내 것은 없지만 부처님 덕에 밥 먹고 잠자고 하니 내 것이 없는 것은 아닌 이치이다. 이것이 바로 유법(有法)과 무유법(無有法)이 즉(卽)하였다고 하는 유법즉무유법 무유법즉유법의 이치이고 이 이치가 곧 실무유법(實無有法)의 이치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옵니다."


여기에서 유법(有法)이란 사상(四相)이 있는 법을 말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스승의 처소에서 사상(四相)이 있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는가."라고 하시니, 수보리는 무상(無相)의 이치를 깊이 이해하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사상(四相)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佛言 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부처님의 뜻에 잘 계합하였으므로 '그렇다'라고 하신 것이니, '그렇다'란 말은 인가한 말인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 처소에서 부처님과 같이 살았으므로 부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 燃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부처님이 곧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하시지 않았겠지만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부처님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니,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이름이시고 연등불이 계실 때는 선혜(善慧)보살이었다. 연등부처님이 그 마을에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부처님에게 올릴 선물을 구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꽃 7 송이를 가지고 지나가는 여인을 만나자 그 여인이 청하는 은 100량과 청혼의 청까지 들어가며 그 꽃을 얻어 부처님께 바치었다. 이를 모두 아시는 부처님은 이 꽃을 하늘에 올려 그의 지극한 정성을 치하하였다. 그 후 부처님이 지나가는 길 웅둥이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 그의 몸과 머리를 그 곳에 깔아 부처님께서 그를 밟고 지나가시게 했다. 이와 같이 지극한 그의 정성에서 연등불께서는 선혜보살에게서 자기를 완전히 버려서 사상(四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중도를 행하고 있음을 보시고 수기를 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로 아∙인∙중생∙수자가 없어야 비로소 보리의 수기를 얻을 것이니, 내가 만약 법이 있어 보리심을 발했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수기를 주지 않으셨겠지만 실로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비로소 나에게 보리의 수기를 주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일단의 글은 모두 수보리가 무아의 뜻을 이룬 것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곧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


앞에서 실무유법(實無有法)을 설명할 때 유법(有法)에 극단도 아니요 무유법(無有法)에 극단도 아닌 유법즉무유법(有法卽無有法) 무유법즉유법(無有法卽有法)인 중도가 곧 실무유법(實無有法)이라고 하고 실다운 것은 항상 여여(如如)하다고 했다. 이는 곧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은 의미이다.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제법여의(諸法如義)]'이라고 한 것은 제법이란 곧 색성향미촉법이니 육진 가운데 잘 분별하되 본체가 담연하여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일찍이 변해서 달라짐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이 부동하여 원만히 통하고 밝게 사무쳐서 몇 겁을 지나도 항상 있는 것과 같으므로 이것을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라고 한 것이다.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에 「헐뜯거나 칭찬에 동하지 않는 것이 여래의 행이다.」라고 하였으며, 『입불경계경(入佛境界經)』에 「모든 욕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관(觀)할 것이 없는 데에[무심처(無心處)] 예경한다」고 하였다.


若有人 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如來 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에 실도 없고 헛됨도 없나니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부처님께서 실무유법(實無有法)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은 것이다. 실무유법이라고 함은 유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사상(四相)이 없음을 의미한다. 법도 없고 사상이 없으므로 능소가 없고 취할 것도 없고 취할 사람도 없으니 무실(無實)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실무유법이란 무유법(無有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진여 체가 무유법이나 이 무유법에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이 있는 법신이 있으니 없다고 결코 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이 법회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10.00 씩 준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법회에 참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0불이라는 실리(實利)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지만 절에서 10불 씩 준다는 절은 없으므로 절 법회에 참여하는 것은 무실(無實) 실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에 와서 기도도 하고 법문을 듣고 법우들도 만나고 하다보면 절에 오기 전에보다 마음이 편안하여짐을 느낀다. 절에 오는 것이 실리(實利)는 없지만 그렇다고 허무하거나 허망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무허(無虛)이다. 기도에도 어떤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요 법문에도 돈과 같은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 법에 무루성공덕이 있는 것이니 수많은 사람이 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형상이 있는 것과 같은 실리(實利)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형상이 없는 무루성공덕이 있으므로 무허(無虛)하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것이 없는 마음으로 보리를 얻나니, 얻을 마음이 나지 않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마음을 떠나서는 그밖에 다시 보리 가히 얻을 것이 없으므로 소득심(所得心)이 없는 것이니‘ 실이 없다[무실(無實)]’고 한 것이고, 소득심이 적멸하여 일체 지혜가 본래 있고 만행이 다 원만히 갖추어져서 항하사의 덕성을 쓰되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므로 ‘헛됨이 없다[무허(無虛)]’고 한 것이다.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모든 법이 실도 없고 허도 없기 때문에 불법(佛法)이라고 한다. 유법(有法)도 불법(佛法)이요 무유법도 불법(佛法)이니 일체가 모두 불법(佛法)이라는 것이다.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 一切法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니다. 이 까닭에 일체법이라 하느니라.


유법이나 무유법이 모두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유법에 즉하여 무유법이 있고 무유법에 즉하여 유법이 있기 때문이나 사람이 어리석어 유법이나 무유법에 탐착하니 곧 사상(四相)이 일어나고 사상이 일어나는 일체법은 곧 일체법이 아니라 이름이 일체법이라고 하여 탐착에서 일어나는 사상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능히 모든 법에 마음으로 취사함이 없으며, 또한 능소도 없으면 열심히 일체법을 세우지만 마음이 항상 공적할 것이니, 그러므로 알라. 일체법이 다 불법이지만 미혹한 사람은 일체법에 탐착하여 이로써 불법을 삼을 까 두려워해서 이런 병을 고치기 위해 “곧 일체법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고, 마음에 능소가 없어서 고요하되 항상 비추면 정혜가 함께 행해지고 체와 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일체법’이라고 한 것이다.


須菩提 譬如人身 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 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함과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사람 몸의 장대함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인신장대(人身長大)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큼 컨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큼 커 사람들이 탐착하는 대상이 되기 쉽지만 사람의 몸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고 사대는 무상(無常)한 것이니 탐착할 것이 못되는 것은 마치 일체법에 탐착하면 사상(四相)이 허망한 것과 같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인신장대(人身長大)라고 설하시는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이 큰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몸은 법신(法身)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곧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이 큰 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여래께서 사람 몸의 장대함이 곧 큰 몸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마음을 지적함이요, 마음은 곧 일체 중생의 법신을 말한다. 일체 중생의 법신이 본래 처소가 없는 것을 나타내므로 곧 큰 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법신은 둘이 아니어서 한량이 없으므로 큰 몸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색신이 비록 크나 안으로 지혜가 없으면 곧 큰 몸이 아니고 색신이 비록 작으나 안으로 지혜가 있으면 큰 몸이 되지만, 비록 지혜가 있으나 능히 행하지 않으면 곧 큰 몸이 아닌 것이다.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해서 깨달아 제불의 위없는 지견에 들어가 마음에 능소가 없고 한량이 없으면 이것을 큰 몸이라 한다.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일 ‘내가 마땅히 무량한 중생을 멸도했다’고 말 한다면 곧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하여 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하기를 ‘일체 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자기의 설법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번뇌를 없앤다고 말한다면  이는 자기에게 있는 어떤 법으로 남의 번뇌를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이를 법아(法我)라고 한다. 만약 자기가 능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나와 중생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아소(我所)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중생을 제도했으나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아(我)와 인(人)이 없어지지 않으면 보살이라 할 수 없고, 열심히 여러 가지 방편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지만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보살이라 할 수 없고, 없으면 곧 이는 보살이다. 능소가 있으면 나도 있고 중생도 있고 내 것이라는 것도 있으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유법(有法)의 마음을 가진 보살이므로 보살이라 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능소가 없을 때 실무유법(實無有法)이 성립하고 실무유법이 성립할 때 반야지혜가 생하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 그리고 능소가 없고 실무유법이 성립할 때 일체법에는 사상이 없다. 사상이 없으므로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라고 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 할 점은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라고 하였지 佛說一切法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有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이다.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토를 장엄하리라’고 말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불토(佛土)라고 함은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약자이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로서 중생의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의미한다. 사회가 불국정토가 되기 위해서는 절이 불국정토가 되어야 하고 절이 불국정토가 되기 위해서는 신도 각자의 마음자리가 불국정토가 되어야 한다. 장엄불토(莊嚴佛土)라고 함은 중생으로 하여금 사상(四相)을 여의게 하여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보살이 내가 마땅히 장엄불토를 하겠다고 하면 그 보살에게는 아상(我相)이 있고 불토를 장엄한다는 법상(法相)이 있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게 된다. 이는 보살이 능과 소를 분리시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이니 실무유법(實無有法)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살은 유법(有法)에 집착하여 사상(四相)을 일으키고 있고, 이 사상에 얽이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보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로 하여금 이러한 유법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장엄불토란 상을 세우는 장엄불토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다시 그 이름이 장엄불토라고 긍정하는 논법을 씀으로서 장엄불토를 하되 상이 없는 장엄불토를 할 것을 유도하시는 것이다. 봄이 되니 꽃이 피는 것이지 내가 그 꽃을 피게 하는 법을 가지고 있어 꽃을 피워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 큰 오만이니, 자연의 힘에 의하여 혹은 부처님의 가피에 의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지 내 힘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보살이 만약 자기가 능히 세계를 세웠다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고, 비록 능히 세계를 세웠으나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 열심히 세계를 세우지만 능소심(能所心)이 생기지 않아야 이를 보살이라 한다. 『최승묘정경(最勝妙定經)』에 「가령 어떤 사람이 백은(白銀)으로 절 짓기를 삼천세계에 가득히 할지라도 일념(一念)의 선정심(禪定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곧 선정이 아니고, 능소가 생기지 않아야 선정이라 하니 선정이 곧 청정심인 것이다.

송철순 거사님과 이일희 거사님이 밭에 고추도 심고 깻잎도 심었다. 만일 송철순 거사님이 이 고추와 깻잎은 내가 심었다. 보살님들이 이 깻잎과 고추를 따 먹는 것을 보니 정말 기쁘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송 거사님은 아직 보살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송 거사님이 내가 고추와 깻잎을 심어서 자라 고추가 열리고 깻잎이 달려 이제 먹게 되었다고 한다면 송 거사님은 고추를 심고 깻잎을 심는 법(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송 거사님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고추를 심고 깻잎을 심는 것은 봄이 왔으니 심는 것이고 밭이 있으니 심는 것인데 이 조건에 비교하면 송 거사님이 한 일은 너무나 적은 일에 속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내가 있고 고추가 있고 깻잎이 있고 그들을 따 먹는 보살이 있다고 보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송 거사님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려 있으니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송 거사님이 봄이 왔으니 그리고 밭이 있었으니 내가 고추와 깻잎을 심을 수 있었지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고추와 깻잎을 심을 수 있었겠는가고 생각한다면 송 거사님은 고추와 깻잎을 심을 수 있는 법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이치를 아는 자만심이 없는 보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잡초를 뽑아 줄 때마다 내가 물을 주고 비료를 주니 고추와 깻잎이 잘 자란다고 생각하기보다 그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게 여겨지고 그들이 잘 자라는 것이 자기 마음에 흡족하게 와 닿을 때 송 거사님과 그 고추나무 깻잎은 더 이상 둘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보살들이 그 깻잎과 고추를 따서 부처님에게 올리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나 감명 깊은 기쁨을 느낄 때 그 보살과 송 거사님과도 둘이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이 불이(不二)관계가 성립할 때 능소(能所)가 없다고 한다. 송 거사님이 보살이 깻잎과 고추를 따 부처님께 올리는 것을 볼 때 저 고추는 내가 심은 것인데라고 생각함이 없고 내가 심은 것을 저 보살이 부처님께 올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없이 다만 기쁠 뿐이기 때문에 능소가 없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송 거사님을 보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송 거사님은 이와 같은 보살심을 발하셨다고 생각한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무아와 무법을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진실로 그를 보살이라 하느니라.”


무아법(無我法)이라고 하는 아(我)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의미하고 법(法)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의미한다. 아도 없고 법도 없다는 뜻은 눈이 물질과 접촉할 때 안식(眼識)이 물질을 보고 착각하여 그 물질에 대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상(四相)이 일어나 그 사상에 집착하여 모든 부정(不淨)한 일이 일어나고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不淨)한 일이 일어나고 번성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아집도 없고 법집도 없는 무아법(無我法)을 설하는 것이다. 이 무아법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통달무아법(通達無我法)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한 보살을 참된 보살이라고 여래께서 설하신다.

무아(無我)에 대하여는 그동안 계속 설명하여 왔으니, 오늘은 무법(無法)에 관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 뜻이 각각 있다고 하는 법이다. 그런데 눈은 눈의 이익만 챙기고 귀는 귀의 이익만 챙기고 코는 코의 이익만 챙기면 결국 서로 망하는 악성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게 되어 공멸하게 된다. 왜 공멸하느냐? 눈 귀 코 혀 몸 뜻의 내면세계를 보면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상통(相通)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가 아파도 목이 아플 수 있고, 귀가 아파도 코가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코가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것은 자연법에 어긋나는 짓이니 내면세계 법에 의하면 눈 귀 코 혀 몸 뜻은 서로 상통(相通)하여 별개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법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법(無法)이다. 이 지구의 삼라만상도 이와 같이 상통하는 관계에 있고 이 우주의 모든 별도 이와 같이 상통하는 관계에 있고 시방삼세의 모든 존재도 이와 같이 상통하는 관계에 있으니 모두가 하나라는 법이 무법(無法)이다.        

이 무아법(無我法)을 수행으로 깨치게 하는 참선을 위빠사나 선에서 사수관(死隨觀)이라고 한다. 이 관법을 현재 토요일 수선회에서 수련하고 있다.

모든 법상에 걸린 바가 없는 것을 통달(通達)이라 하고 법을 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무아법(無我法)이라고 한다. 무아법(無我法)이란 여래가 진실로 그를 보살이라고 하였으며, 분(分)을 따라 행하고 수지하는 것을 또한 보살이라 한다. 그러나 아직 참다운 보살이 되지 못했으니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원만하여 일체 능소심이 다해야 바야흐로 진실로 이것이 보살이 된다고 한 것이다.


대의(大意)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였어도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마음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마쳤어도 한 중생도 실로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보살은 실무유법(實無有法)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기 때문에 참된 보살이다.

실무유법(實無有法)이란 실(實)과 무유법(無有法) 두 단어로 되어 있고 무유법(無有法)이란 유법(有法)의 대칭어이다. 유법이란 산이 있고, 물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내 것이 있고, 네 것이 있다고 하는 법이다. 이러한 법이 있기 때문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일어나 악성(惡性)을 유포하게 된다. 이러한 악성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유법이란 허망한 것이라고 하여 산도 없고, 물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내 것도 없고, 네 것도 없다고 무유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유법은 일체 유위법이  동시(同時)에 상의(相依) 상생(相生)하여 연기함으로 하나이고 하나이기 때문에 평등하니 무유법이라고 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네 것도 없으므로 자기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허무와 체념에 빠지는 수자들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수자들을 위하여 유법의 극단도 피하고 무유법의 극단도 피하여 실다운 중도의 길로 가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실무유법(實無有法)이다. 이 실무유법에서 항상 여여한 도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실무유법(實無有法)의 뜻을 더욱 깊게 새기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부처님의 전생에 선혜(善慧) 보살로 있을 때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선혜보살에게 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혜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느냐고 묻고 수보리는 선혜보살이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있을 때 무유법(無有法)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고 대답한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대답이 옳다고 칭찬하시며 만약 선혜보살에게 법이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이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되리니 호를 석가모니로 하리라”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실무유법(實無有法)으로 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었기 때문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신 것이다. 왜냐 하면 여래라는 것은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실무유법이야만 모든 법이 여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법에도 기울지 않고 무유법에도 기울지 않아 실다워 여여하다는 것이다.

여래가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중에는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유법(有法)은 모두 허망하니 취할 바가 없으므로 무실(無實)이라고 하고 무유법(無有法)에는 일체가 평등하여 하나이지만 지혜의 덕성(德性)인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이 있으므로 무허(無虛)하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유법과 무유법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여 이해시키려 하신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일체법은 모두 부처님의 법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일체법이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이 장대(長大)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몸이 장대하여 좋기는 하지만 몸이란 본래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항시 변하고 있는 것이니 허망한 것이다. 그러하니 장대하다고 하여도 장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몸은 작아도 작다고 할 수 없고 그 지혜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몸은 참으로 장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닌 몸(마음)이 진실로 장대한 것이다.

보살 역시 무량한 중생을 자기가 제도한다고 한다면 이는 곳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생각에는 자기가 있다는 아상이 있고, 자기가 중생을 제도할 법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있고, 인 중생 수자상을 가지고 자기가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니 곧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실무유법(實無有法)에서 보살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일체법은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이라고 하셨다.

보살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도 이와 같다. 자기라는 상이 있고 자기가 장엄할 불토가 오만하게 있다고 생각하고 중생을 제도할 설법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만심에 찬 말을 하니 보살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무아(無我)와 무법(無法)의 이치를 통달한다면 여래께서 진실한 보살이라고 하실 것이다. 무아(無我)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없어 능소가 없으니 아(我)가 없다는 이치이고, 무법이란 어떠한 법도 하나로 통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는 없으니 어떠한 존재가 독존적인 자세를 취하면 오만한 탓이고 무법의 이치를 깨치지 못한 탓이다. 육근(六根) 육진(六塵)은 모두 하나로 통하니 개별적으로 독존하는 법이 없다는 뜻에서 무법(無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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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The Diamond Prajnaparamita Sutra / Translation and Commentary (hwp, pdf) file 현성 2011.11.12 12184
36 [금강경] 목차 및 원문(한글해설) file 여해 2007.03.01 34506
35 [금강경]2.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는 참이 아니다) 여해 2007.03.01 15586
34 [금강경]2.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第三十一 (자기 소견을 내지 않음) 여해 2007.03.01 12374
33 [금강경]2.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第三十 (하나로 합하는 이치의 모양) 여해 2007.03.01 13101
32 [금강경]2.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위의가 적정하다) 여해 2007.03.01 12604
31 [금강경]2.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第二十八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다) 여해 2007.03.01 12377
30 [금강경]2.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끊을 것도 없고 멸할 것도 없다) 여해 2007.03.01 13154
29 [금강경]2.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법신은 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해 2007.03.01 11576
28 [금강경]2.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第二十五 (교화해도 교화를 받은 자가 없다) 여해 2007.03.01 11447
27 [금강경]2.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第二十四 (복덕과 지혜에 비교할 수 없다) 여해 2007.03.01 11717
26 [금강경]2.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第二十三 (청정한 마음으로 선(善)을 행하다) 여해 2007.03.01 12122
25 [금강경]2.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第二十二 (가이 얻을 법은 없다) 여해 2007.03.01 12228
24 [금강경]2.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第二十一 (설함 없이 설한다) 여해 2007.03.01 11386
23 [금강경]2.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第二十 (색과 상을 여의다) 여해 2007.03.01 12331
22 [금강경]2.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第十九 (법계를 다 교화하다) 여해 2007.03.01 12005
21 [금강경]2.18 일체통관분(一體同觀分) 第十八 (일체를 동일하게 보다) 여해 2007.03.01 1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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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금강경]2.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第十六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하다) 여해 2007.03.01 12724
18 [금강경]2.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第十五 (경을 수지한 공덕) 여해 2007.03.01 12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