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1.3 금강반야바라밀경 제목 해석

2007.03.01 15:49

여해 Views:12568

3. 『금강반야바라밀경』제목 해석

『금강경』의 32분과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1,000년 경에 북인도에 무착보살이 일광정(日光定)(삼매)에 들었습니다. 도솔천에 미륵보살을 친견하여 금강경의 대의를 무르니 89게송을 읊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무착보살이 동생 세친에게 주었습니다.

세친보살은 이를 읽고 『금강경』을 단혹(斷惑)을 하는 사상이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반야론에서 27가지의 의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27가지 의심이 사람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인데 금강경에서 이 미혹한 의심을 끊는 법을 설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친은 『금강경』을 27단락으로 분류(分類)하였으며, 무착보살은 사람이 성불에 이르기까지 수행상에 18계위를 완성하여야 한다고 하여 『금강경』을 18분과(分果)로 나누었습니다. 이 두 가지 무착과 세친의 『금강경』 논송 등이 중국으로 넘어와, 당시 양나라의 소명태자가 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소명태자는 달마대사와 인연이 있었던 양무제의 아들입니다. 이 소명태자는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태자인지라 『금강경』이 「여시아문」에서 시작하고 「신수봉행」에서 끝나는데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음을 느끼고, 『금강경』을 32분(分)으로 나누고 각 분과마다 분목(分目:제목)을 붙였습니다. 즉 소명태자가 “法會因由分 第一”이라는 제목(分目)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금강경』을 독송할 때 제목을 읽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명태자에 의하여 제목이 붙여졌으니까 원문에는 제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금강경』의 내용.

『금강경』의 내용은 제목의 이름에서(題名上) 보면 가장 굳은 금강석(金剛石)이 능히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음을 설하고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반야의 지혜로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절대적인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는 아상∙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사상(四相)을 씻어내고, 아공(我空)∙인공(人空)∙법공(法空) 삼공(三空)을 체달(體達)해, 성상무애(性相無礙)함을 성취하는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반야의 공사상(空思想)을 설하고 있으면서도 공자(空字)를 한번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공사상(空思想)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대승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육바라밀 중 오직 보시 지계 인욕 3바라밀은 명시적으로 설하고, 나머지 정진 선정 지혜는 명시적으로 설하지 않으면서도 그 뜻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을 명시적으로 나타낸 것은 잘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보시를 설하고 존경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계행을 수지하게 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자기 중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기 제어를 할 수 있게 하고 자기제어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욕을 자제로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간접화법으로 『금강경』을 독송하는 행자로 하여금 지혜와 선정을 위하여 스스로 발심하여 정진하도록 설하고 있습니다.


경의 제목 해석.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금강」이라는 단어와 「반야」, 「바라밀」, 그리고 「경」이라고 하는 4자로 되어 있습니다.

「금강」이라는 단어는 굳건하다 강건하다 예리하다 날카롭다 밝다 선명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굳건하기로 말하면 불변의 뜻이 있고, 강건하기로 말하면 불멸의 뜻이 있다. 불멸의 뜻이 있으므로 절대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누구도 파괴하지 못하는 영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경에서 가르치는 바는 진리이기 때문에 불변하고 불멸하고 누구도 파괴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치심이 영원하다는 의미는 그를 설하신 부처님이 영원하다는 의미가 되며, 부처님이 영원하시다는 의미는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영원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이유는 중생인 우리들에게도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성이 굳기로 말하면 불변하는 것이요, 강건한 것으로 말하면 불멸한 것이요, 불멸하기로 말하면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원무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이름도 불교의 이름입니다. 철위산(鐵圍山)이라는 이름과 같은 파괴할 수 없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비로봉을 시작으로 해서 모두 불교의 이름입니다.

예리하기로 말하면 모든 전쟁 무기 중 가장 수승한 무기가 됩니다. 무엇이나 끊고 파괴할 능력을 가진 예리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이야몬드 드릴(drill)을 당하는 드릴빗(drill bit)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금강저(金剛杵)가 있고 이 금강저를 사용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경전에 있습니다. 누구도 금강역사를 당할 신(神)이 없고 이 금강역사가 사용하는 무기가 금강저입이. 불법을 옹호하고 불교신자를 보호하는 신중(神衆)입니다. 이와 같이 예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금강이므로 능히 우리들의 번뇌와 탐욕을 예리하게 끊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날카롭기로 말하면 미진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구별하고 혼돈함이 없이 사리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있을 수 없고 남음이 있을 수 없는 정확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세한 번뇌도 정확하게 찾아 잘라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정확도를 의미합니다. 거친 번뇌인 추(麤)한 번뇌는 우리들이 알기 쉽지만 역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결행력(決行力)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세한 번뇌는 우리들의 의식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업이 두터운 우리들은 추한 번뇌를 다루기도 힘겹습니다. 미세한 번뇌를 다루어야할 때가 되면 금강의 이 날카로운 기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밝고 선명하기로 말하면 아무런 때가 없고 하자가 없는 청정함을 말합니다. 모든 미세한 번뇌마저 사라진 상태입니다. 모든 미세한 번뇌마저 사라진 상태에서 얻어지는 삼매를 금강삼매(金剛三昧) 혹은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합니다. 선정(禪定)에서 최후의 단계 혹은 등각(等覺)이라고도 합니다. 다이아몬드(Diamond)의 밝고 선명함은 결국 부처의 자리인 청정함을 의미합니다.


반야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상계를 보는 지혜를 반야라고 하지 않고 실상계(實相界)를 보는 안목, 보고 판단하는 지혜를 반야라고 합니다. 실상계(實相界)라고 함은 모든 이름과 형상과 문자의 얽매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벗어난 상태를 인격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비로자나불을 법신(法身)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실상과 법신은 동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실상반야라고 합니다.

이 실상반야와 금강의 굳건하고 강건한 성질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상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하며 불멸하고 어느 것에 의하여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상반야는 법신의 무변하고 무량한 지혜가 됩니다.

실상(實相)의 이치를 관조하는 지혜를 관조반야(觀照般若)라고 합니다. 실상의 이치는 현상에서 나오고 현상의 이치는 실상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관조하면 실상의 이치가 나오고 실상을 관조하면 현상의 이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과 실상은 둘이 아닌 하나의 조화된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즉실상 상즉성(相卽性) 성즉상(性卽相) 차별즉평등 중생즉불 지옥즉열반을 관조하는 지혜를 관조반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관조해서 실상의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고 실상에서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이 행자는 보신불(報身佛) 혹은 응신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관조반야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감응하게하고 그들이 닦은 만큼 그 결과를 체험하여 더욱 발심하여 정진하게 하는 부처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관조반야와 유사한 경우를 경험할 수 있다. 자동차 정비공이 엔진 소리만 듣고 무엇이 고장인 것을 정확히 꼬집어 내어 고쳐서 자동차가 잘 운행될 때 이것이 일종의 관조반야가 되는 것입니다. 엔진 소리는 현상이고 고장 난 부분은 실상입니다. 의사가 환자 얼굴만 보고 무슨 병인지 정확히 진단하여 처방을 내어서 환자가 완치되었으면 이것도 역시 일종의 관조반야입니다. 환자의 얼굴은 현상이고 환자가 아픈 부분은 실상입니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관조반야는 생명의 실상을 관조해서 알아내는 지혜인 것이 다를 뿐입니다.

지옥즉열반 중생즉불이지만 이러한 단계에 가기 위해서는 참회를 통한 업장소멸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업장소멸 한다고 아무 것이나 무모하게 자르고 붙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예리하고 날카롭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금강력사가 사용하는 금강저의 무기도 관조반야의 지혜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는 정확도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참선을 통해서 염불을 통해서 업장소멸을 하려고 할 때 그 업장을 찾아내고 자르는 과정이 가장 예리하고 날카롭게 진행되어야 업장소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포괄적인 업장소멸, 예를 들면 그동안 나의 잘못을 참회합니다와 같은 포괄적인 업장소멸을 위한 노력은 예리하고 날카롭지 못한 참회가 되고 또 업장소멸이 됩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업장소멸을 위해서는 현재에서 과거를 예리하게 그리고 반복하여 살펴 잘못된 인연을 찾아 참회를  구체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참회가 될 때 예리하고 날카로운 업장소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화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그 법을 설하실 때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부처님의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그 당시 부처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 현상과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하신 실상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게 된다. 문자를 통해서 현상과 실상을 직관 할 수 있는 능력을 문자반야라고 합니다. 『금강경』을 읽고 『금강경』을 설하실 당시 부처님의 마음과 계합하게 되는 것을 문자반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처님의 뜻과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반야는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문자에 집착하거나 개념에 집착하여 불경(佛經)의 원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들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문자반야입니다.

문자반야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고 선명하여야 합니다. 밝고 선명하기 위해서는 청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에서 문자반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반야는 금강의 밝고 선명함에 해당하고 화신불에 해당합니다. 글자를 알면서도 글자에 집착하여 자기가 글자에 또는 형상에 집착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계속 오류를 범하고 있는 중생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중생을 위하여 화신불이 그들을 깨우쳐서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합니다.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합니다. 저 언덕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다 끝마쳐서 편안한 곳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고통바다에서 벗어나 극락의 부처님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불교적 정의이지만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이 오늘 보다 더 낳은 생활을 위하여 어떤 목표를 세워 놓고 그 목표에 닿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도 바라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월 수입이 2천불인 사람이 월수입 2천 5백 불을 목표로 세워 놓고 꾸준히 노력 한다거나, 가정생활에서 불화와 충돌이 많을 때 가정생활을 원만하고 화목하게 바꾸고자하는 목표를 세워 놓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은 모두 바라밀 행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의 공덕이 아니고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지혜 공덕이 바라밀의 선행 요건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의 공덕을 닦아야 합니다. 그 지혜의 공덕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요소들을 청정하게 하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때를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때를 씻으면 청정해 집니다. 이 때를 우리는 업장(業障)이라고 표현하고 때를 씻는 것을 업장소멸이라고 합니다.

업장소멸을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업장이 이미 지어진 것과 업장이 앞으로 지어질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업에 대한 간절한 참회와 그 이상의 보시행이 필요합니다. 깊은 참회를 통해 다시 지을 업을 사전에 방지하고 보시 행을 통해 참회해야할 대상과 하나가 되어 가는 길을 열게 됩니다. 너와 내가 현상적으로는 다르지만 실상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이치를 체험하게 되는 길로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를 행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참회하는 것으로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길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하나가 되지 않고는 현상즉실상의 이치를 달관할 수 없습니다. 보시 행은 현상적으로 다른 두 개체를 실상적으로 하나임을 인식하게 하고 그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화를 이루고 상호간에서 자비행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 행은 각각 다른 두 개체가 각자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좋은 방편입니다. 마음의 근원의 입장에서는 두 강물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두 강물 개체의 특징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너와 나의 현상적인 특징은 실상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 되는 실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지을 업을 짓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업이라는 것은 때를 의미하므로 앞으로 내 몸에 때가 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계율을 지키는 지계입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음주 불망어를 철저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살생 대신에 방생, 도둑질 대신에 보시, 사음 대신에 사랑, 음주 대신에 건강식, 망어 대신에 애어(愛語)를 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내가 하나 되는 공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善行)의 공덕을 쌓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기능이 자유자재하여야 합니다. 탐욕이 일어나거나 성냄이 일어날 때 이들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자재 하여야만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불가(佛家)에서 인욕바라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는다는 생각 없이 절제하고 양보한다는 생각 없이 통제되는 마음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참아서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이게 하는 것은 인욕이지 인욕바라밀은 아닙니다. 참았어도 참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마음에 즐거움이 있을지언정 스트레스는 없는 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을 바르게 행하여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진(精進)이 필요합니다. 오직 일념으로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는 출가승을 비롯하여 재가자에 이르기까지 정진(精進)이 나태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진이 나태하여 지거나 퇴락하게 되면 보시 지계 인욕도 나태하여 지거나 퇴락하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밀을 성취하는 수행자나 재가자가 없는 것은 열반을 증득하는 행자가 없다는 말이 되며 열반을 증득하는 행자가 없는 것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행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말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습니다. 이민 일세가 해야 할 다급한 문제는 돈을 벌고 자녀들 교육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만 유독 불교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처음부터 불교를 잘못 이해한 데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돈을 벌고 자녀를 교육하는 모든 문제를 포함하여 어느 것 하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는 개인이 해야 할 일들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도와주는 종교입니다. 불교를 열심히 믿고 봉행하면 길이 열리게 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도와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넓어지고 포용력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예리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끊을 것 끊고 붙일 것 붙여 현실과 실상을 조화롭게 평정하여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성공이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기독교를 열심히 믿어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여 교회를 어린이 교육에 적합한 환경 조성을 할 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또 교인 각자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마음의 종교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믿고 행하면 어찌 그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은 하늘을 덮고도 남고 바다를 덮고도 남습니다. 지금까지 발달한 모든 문화와 문명, 상업과 사업, 과학과 컴퓨터, 의학과 제약 어느 한 가지도 인간의 마음에 의하여 성취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여 성취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하고 그 결과로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 신자로서 반드시 지혜롭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는 많은 돈을 벌게 할 수도 있고 지혜는 한없는 행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선행조건입니다. 사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사업입니다. 불교 신자의 사업은 지혜로워야 하고 부지런함은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지혜를 쌓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일단 지혜가 쌓아지면 어떠한 금전적인 자본보다 값진 자본이 될 수 있고 영원히 내 손에서 떠나지 않는 자본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이와 같이 값진 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단 바라밀을 성취하게 되면 인간의 삶이 어느 곳에나 적용이 가능한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중생도 구제할 수 있는 바라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벌게 할 수 있어야하고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바라밀을 성취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라고 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경(經): 인도 말 〈수우트라Sūtra〉를 뜻 번역한 것이고 음역(音譯)은 수다라(修多羅)입니다. 그 뜻은 진리에 딱 들어맞고 중생들의 능력에 알맞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설해야 할 내용을 꾀고 있다는 관자와, 교화해야 할 중생을 섭수한다는 섭의 뜻을 갖춘 것을 경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짤 직자 직물과 같이 씨줄 날줄로 묶어놓은 것을 경이라고 합니다. 여하간 부처님의 말씀이라 우리가 숭상하고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을 경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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