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금강경』 본문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第一  (법회가 열린 이유)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대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이 때 세존은 공양할 때가 되어서 옷을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 걸식을 했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한 후 세존은 본처에 돌아와 공양을 다 드시고 의발을 거두어 치우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았다.


[여시아문]: 아난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에게서 들었다”하니 이는 자기의 설이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시아문]은 부처님의 유언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세 가지 유언: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부처님에게 질문을 하였을 때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경전을 편집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여시아문”이라고 경전 첫머리를 하고 너희들이 들은 대로 결집 해라’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동안에도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시비하고 비방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는데 돌아가신 후 이러한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묵빈대처(침묵으로 대처)”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경전의 첫머리는 항상 [여시아문]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如자가 “같다”라고 하는 의미만이라면 사似자도 있고 유猶자도 있는데 여如자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是자에도 차此자도 있고 자玆도 있는데 이是자를 쓴 이유.

“나”라는 의미를 가진 아我자에도 오吾자도 있는데 아我자를 쓴 이유.

“듣는다”에도 문聞자도 있지만 청聽자도 있습니다. 문聞자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한문에는 한 글자가 담고 있는 많은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인도말로 된 원문과 가장 가까운 글자를 골라 쓰니 [如是我聞]이 된 것입니다.


[여(如)]자의 뜻에는 여여(如如)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여(如如)하다는 뜻은 항상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시작이 없고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으니 긴긴 밤에 달빛이 홀로 비치듯 고요합니다. 파도가 칠 때는 파도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것은 속세와 같이 생사(生死)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가 있을 때는 시골 장터나 백화점 세일할 때처럼 항상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파도가 칠 때, 물은 보이지 않고 파도만 보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곧 물이요 물이 곧 파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도와 물은 불이(不二)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파도를 일으킨 것이 아니요 물이 파도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하여 물이 움직여지고 물이 움직여지니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힘이 사라지면 파도는 사라지고 물은 고요함으로 돌아옵니다. 파도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물은 파도가 일어나나 사라지나 항상 물로서 남아 있으므로 여여(如如)하다고 합니다. 이 여여(如如)한 물은 비로자나 화장세계요 그 물에 의하여 조성되는 파도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여(如如)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상(實相)의 세계를, 파도는 생멸(生滅)의 현상(現相)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파도는 바램이 있고 함이 있고 얻음이 있는 세계요 물은 바램도 없고 함도 없고 얻음이 없는 세계입니다. 이 파도의 세계를 유위법(有爲法)의 세계라 하고 이 물의 세계를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라고 합니다.

파도를 일으키는 힘은 외부에서 오는데 달과 지구의 인력 바람 등이 외부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서는 업(業)입니다. 업이 마음의 파도인 생멸의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현상의 세계는 형상이 있으므로 유(有)이고 실상(實相)의 세계는 형상이 없는 세계이므로 무(無)입니다. 이 형상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인 유무(有無)를 물과 파도의 관계에 비유하면 유무불이(有無不二)관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물에서 외부의 힘에 의하여 형상이 일어난 것이 파도요 파도가 사라진 것이 곧 물이므로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 됩니다. 파도가 생겼다고 하여도 물을 여의고 파도가 생긴 것이 아니요 파도가 사라졌다고 하여도 물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물은 사라지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여여(如如)를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여(如)]로서 그 뜻을 대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여(如)를 출세간의 입장에서 보면 참된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거짓이 없는 것이고 다른 이물질(異物質)이 끼여 있지 않는 여여하고 여실한 것입니다. 우리 세간의 입장에서는 이 여여(如如)함에는 형상이 없으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들의 이 여여(如如)함의 본성은 현상세계에서 꾸준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의 여여(如如)함의 본성에 때가 끼어 있다든지 참되지 못한 이물질이 끼여 있으면, 이 사람의 꾸준함은 참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이 있거나 이물질(異物質)이 끼여 있으면 그의 꾸준함은 가식 없는 꾸준함이 될 수 없고 오래갈 수 있는 꾸준함이 될 수 없습니다.

세간의 삶에서 꾸준하게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습니다. 출근 시간도 잘 지키다가 때로는 지키지 않고, 하는 일도 잘 하다가 또 망치기도 하고, 신용도 잘 지키다가 지키지 않고, 밥 먹는 시간도 일정하게 잘 지키다가 지키지 않고, 먹는 양도 맛있는 음식일 때 많이 먹고, 맛이 없을 때 적게 먹고, 절에도 열심히 나왔다가 나오지 않고, 좋을 때 한없이 좋다가도 갑자기 천지가 동하게 화을 내고, 변덕이 심하고, 살아감에 술에 의지하거나, 담배에 의지하거나, 노름이나 마약에 의지하는 등등 하는 일들이 이와 같이 기복(起伏)이 심한 사람을 우리는 꾸준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믿기 어렵고 의지하기 어렵고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격상에 무엇인가 절제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먼저 자신을 절제할 줄 알고 통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 발전 시켜나가야 합니다.

출세간의 세계에서 여여(如如)한 것에 무한한 가치를 두듯이 세간에서는 꾸준한 것에 무한한 가치를 둡니다. 왜냐하면 꾸준한 사람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를 고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꾸준하지 못할 때마다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가? 자신이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심할 때는 남이 나를 절제하여 줍니다. 이 남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이는 부인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님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범위 밖으로 나가게 되면 경찰이나 검찰청 재판소 감옥 등이 잘못된 성품들을 고쳐주려고 나타나게 됩니다.

남에게 신세를 지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들을 하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러한 상태로 발전하기 전에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는 기능을 가동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기고 꾸준한 모습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세간살이에서 일단 꾸준한 모습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일들에서 성공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꾸준한 모습을 지킬 수 없을 때 설사 운이 있어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성공에도 기복(起伏)이 심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꾸준한 모습을 지킬 때 역시 꾸준한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내가 기복이 심한 사람이면 역시 기복이 심한 사람들을 상대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자기의 주변 환경이 자기가 하는 일의 성패를 가려줍니다. 작업장에서도 일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지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작업장 주변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노-트는 잘 정리되어 있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의 노-트는 무슨 말을 적어 놓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주변에 단순하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복잡하고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꾸준한 것을 생활의 바탕으로 할 때 그 위에 많은 것을 쌓아 갈 수 있습니다.  불교인의 경우 지혜와 복덕은 꾸준한 바탕 위에 쌓아 갈 수 있습니다. 꾸준함을 바탕으로 하지 못하고 기복이 심한 사람은 지혜와 복덕을 쌓아 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술을 안 먹다가 갑자기 폭음을 하여 뜻밖의 사고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고기를 안 먹다가 어느 날 지나치게 많이 먹고, 살생을 안 하다가 어디서 고기를 잡아오고 하는 등 불규칙한 일을 저질러 쌓아 놓은 복을 완전히 다 까먹고 적자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하지 못한 사람은 지혜와 복덕을 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사람들은 지혜와 복덕을 쌓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주는 일을 꾸준하게 하고, 절에서 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보시를 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집안일들을 화목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은 복덕을 쌓아 가는 길입니다. 하는 일들을 더 쉽게 해결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가정생활을 더 재미있게 하려고 꾸준하게 그 방법을 모색하고, 직장에서 자기의 효율을 높이고 직장에 이익을 주기 위하여 꾸준히 그 방법을 모색하는 등은 지혜를 쌓아 가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지혜와 복덕을 쌓기 위하여 꾸준하게 노력해 나갈 때 그에 감응하여 응신불인 보신불이나 화신불이 그에게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보신불과 화신불이 우리들의 마음의 세계에 들어와 작용하는 것을 부처님의 명훈가피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명훈가피력을 입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공과 무한한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는 마치 자연의 이치가 여여(如如)함을 근본으로 하고 있듯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는 꾸준함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꾸준함을 근본으로 삼을 때 시방삼세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 신중님들이 그를 옹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먼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꾸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불타사가 당하였던 여러 가지 파도가 몰아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불타사 역대 회장님들은 꾸준하게 절에 나오시고 있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회장님들은 임기가 끝나면 그 절에 다시 나가지 않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이는 꾸준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타사 전 회장님들은 아주 훌륭한 전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 노보살님들의 꾸준함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상관없이 항상 이 절의 부처님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이 노보살님들의 꾸준하심의 공덕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는 꾸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꾸준한 분위기에 부처님의 가호가 항상 계시고 가피가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는 『금강경』의 첫 구절인 “여시아문”, 여시아문의 첫 자인 「여(如)」자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금강경』의 공부도 꾸준함이 결여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이 법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하는 것은 기복(起伏)이 있는 것이고 꾸준하지 못한 것입니다. 꾸준하지 못하면 이 귀중한 『금강경』을 공부하는 정말 희유한 기회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놓치게 됩니다. 『금강경』을 공부함에도 꾸준함이 근본이 됩니다.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이 꾸준함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시고 꾸준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출세간의 입장에서 여여(如如)한 것은 진리이고 실재(實在)하는 것입니다. 진리인 것은 금강을 설명할 때 말씀드린 굳건하고 강건한 것입니다. 굳건하고 강건한 것은 진리이고 불변이고 불멸하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파괴할 수 있으면 여여(如如)할 수 없고 여여(如如)할 수 없으면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여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을 실상(實相)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인격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비로자나불에서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나오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나왔으므로 비로자나불이 본체입니다. 즉 비로자나불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비로자나불을 법신불이라고 하고 노사나불을 보신불 석가모니불을 화신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 법과 출세간 법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에는 유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세간 법에서 꾸준함은 출세간 법의 여여 혹은 실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꾸준함은 세간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출세간의 여여함과 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할 수는 없지만 여여(如如)함과 같이 닮아 가려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출세간에서 노사나불이 보신으로 성취되듯이 세간에서 복덕을 쌓아 무량한 보살행을 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좀 더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보살행을 하려고 꾸준하게 그 방법을 모색해 가는 것은 출세간에서 지혜의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나신 것과 같이 무량 무변하고 불가사의한 지혜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쌓은 지혜와 복덕은 내세까지 가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是]는 이것이라고 가르치는 뜻이 있다. 물을 가리키며 다 이 파도요, 파도를 가리키며 다 이 물이다. 부처님의 여여한 진리를 가리키는 [이것]이므로 [이것] 역시 여여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여를 가리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바로 볼 줄 아는 우리들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라고 달을 가르치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은 [이것]을 잘 못 아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의 이것을 잘 못 이해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사용하는 사람도 주의를 하고 듣는 사람도 주의를 하여야 할 쉬운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여시아문」에서의 이것인 시(是)는 여여(如如)를 의미하고 「여시」는 『금강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여(如如)가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여를 모르면 이것도 모르는 것이요 여여를 알면 『금강경』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我)]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술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고 약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믿을 수 있게 하려면 “나”역시 “여(如)”에 상응하는 깨끗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如)”에 상응하는 깨끗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여(如)는 여여(如如)함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如如)하다고 하는 것은 시작이 없고 끝도 없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것은 생과 멸이 없는 것이므로 불생불멸을 의미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진리를 우리는 실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실상에 관하여 위에서 금강을 설명할 때 그리고 반야를 설명할 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실상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듣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할 수 있지 이 실상의 경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믿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실상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나는 어떠한 나인가 알아보겠습니다.

“유아(有我), 내가 있다”고 하여도 눈 가운데 티가 들어간 것이요, “무아(無我), 내가 없다”고 하여도 피부에 부스럼이 난 것과 같습니다. 유아(有我)라고 해도 바른 답이 되지 못하며 무아(無我)라고 하여도 우치(愚痴)함이 됩니다. 내가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양변(兩邊)을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에도 무아에도 양쪽에 다 섭(涉)하지 않는 “나”라야 바야흐로 여여(如如)에 계합하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양쪽에 다 섭(涉)하지 않는 “나”는 바로 나의 본성(本性)이고 성(性)이 곧 “나”입니다. 성(性)이 곧 나라고 하는 것은 업아(業我)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업에 따라 듣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본 습관에 따라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낍니다. 김치를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김치를 좋아하고, 농담을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농담을 좋아하고, 남을 희롱하기 좋아하던 습관에 따라 남을 희롱하기 좋아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미술을 좋아하는 것도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모두 자기 과거의 습관에 따라갑니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우리들의 습관이 우리들의 본성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흔히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잘못된 습관이 저지르는 과오를 그 때 그 때 인식해서 그러한 습관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불교에서 유아(有我)라고 하는 의미는 이러한 습관에 젖은 나를 유아(有我)라고 합니다. 이러한 습관에 젖은 나, 습관에 의하여 구속되어 있는 나에서 완전히 탈피한 나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아(無我)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지혜의 공덕을 체험하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아(無我)가 아닌 ‘나’라고 하여 비무아(非無我)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습관과 업의 덩어리인 나를 유아(有我)라고 하고 이 습관과 업에서 벗어난 나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 무아(無我)는 나의 진성(眞性) 본성(本性)에 의한 ‘나’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성에는 무아(無我)라고 하여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바다 밑에 있는 보배처럼 무궁한 보물이 있습니다. 이 보물의 입장에서 볼 때 무아(無我)는 무아가 아니라 보물이 있다는 비무아(非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글자에만 집착하여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라고만 해석하여 허무주의에 빠지는 단견(斷見)을 갖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관습을 벗어버린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아(無我)에서 나의 진성(眞性)이 들어나게 됩니다. 이 나의 참된 성품을 나의 본성이라고도 합니다. 이 본성에서 무궁한 지혜공덕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이 본성을 체(體)로 하여 용(用)을 일으키는 나를 비무아(非無我)라고 합니다. 무아(無我)는 체(體)이고 비무아(非無我)는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즉 비무아(非無我)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자비행을 자유자재로 행하는 ‘나’이고 무아(無我)는 나로 하여금 그 자비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 근원입니다.

유아(有我) 무아(無我) 비무아(非無我)를 벼이삭과 쌀과의 관계에 비유하여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벼이삭이 벼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껍질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껍질을 가진 나를 유아(有我)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업을 가지고 있는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비유됩니다. 여러 가지 껍질을 가진 벼는 그것이 자기라고 집착하여 벼로서 남아 있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고집하지만 방앗간에 한 번 갔다 나오면 벼는 흰쌀이 되어 나옵니다. 이 흰쌀은 벼에 입장에서는 내가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아(非有我) 혹은 줄여서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흰쌀은 우리들의 심성(心性)에서 모든 이물질(異物質), 모든 업장(業障)이 제거된 상태에 비유됩니다. 이 모든 업장(業障)이 제거된 상태의 나를 무아(無我)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는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든 습관, 업장, 이물질(異物質)들을 나로부터 완전히 제거한 ‘나’이므로 쌀에 해당합니다. 벼이삭이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아니고, 모든 껍질을 벗겨 버리고 나니 쌀이 남았습니다. 벼이삭일 때는 그것이 나라고 굳건히 생각하고 모든 것을 벗겨 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쌀이 남았습니다. 벼이삭의 입장에서는 벼이삭은 유아(有我)이고 쌀은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벼이삭은 벼이삭 되로 용도가 있지만 쌀의 용도에 비교 되겠습니까. 이제 이 쌀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밥도 될 수 있고 떡 인절미 송편도 될 수 있고 요즈음에는 케익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벼이삭일 때는(有我) 그 벼이삭속에 내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들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모든 껍질을 벗겨버리고 나니 쌀이 남았습니다. 이삭을 나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쌀은 내가 아니라고 표현하여 비유아(非有我) 또는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제 쌀이 무아(無我)가 되었습니다. 쌀인 무아(無我)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벼이삭의 입장에서 본 쌀인 무아를 무한한 가능성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나가 아니므로 비무아(非無我)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쌀이 떡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쌀이 아니기 때문에 비무아(非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무아(非無我)는 무궁한 쌀의 가능성을 이용해서 모든 중생에게 가장 유익한 음식물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자입니다. 비무아(非無我)는 관세음보살님이나 부처님의 지위에 해당하는 ‘나’입니다.


물과 파도에 비유하여 다시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물이 고요할 때, 물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나: 有我」인가 했더니 파도가 일어나 「나」는 파도로 변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고요하던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나」는 이제 전에 내가 아니다(非有我). 전에「나」가 아니라고 했더니(非有我) 파도가 사라지고 나니 고요한 「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나」가 없는 것도 아닌 ‘나’가 되었습니다(非無我). 이와 같이 유아(有我)가 파도로 변하여 비유아(非有我)가 되고 파도인 비유아가 또 변하여 비비유아(非非有我)가 된 것입니다. 이 비비유아(非非有我)의 비유(非有)를 무(無)로 바꾸어 놓으니 비비유아(非非有我)가 비무아(非無我)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때 내가 최고라고 자만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만에 빠진 내가 유아(有我)입니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온갖 수난(受難)의 파도를 경험하면서 모든 자만심과 아상이 꺾여지고 사라지면서 아만심(我慢心)이 없는 무아(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아만심과 아상이 없는 무아가 되었을 때 자기에게 이미 구족하고 있었던 대지혜광명을 경험하고 무궁한 능력으로 모든 중생의 어려움을 제도하여도 제도하였다는 아상이 없는 비무아(非無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공간(space)을 공기가 채우고 있습니다. 내 코밑에 있는 공기가 「나」라고 생각하였더니 내가 숨을 들이쉬는 바람에 그만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졌나 했더니 내가 숨을 내쉬는 바람에 다시 공간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코밑에 있었던 유아(有我)의 공기는 찰나 사이에 내가 숨을 들이쉬었으니 유아(有我)가 아닌 비유아(非有我)가 되었습니다. 이 비유아(非有我)가 내가 숨을 내쉬니 비유아(非有我)가 아닌 비비유아(非非有我) 즉 비무아(非無我)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아(有我) 비유아(非有我) 비비유아(非非有我)로 사정에 따라 변하였지만 공기 자체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한 번도 멸한 적도 없고 파괴된 적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공간 법계는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으며 영원 무진한 여여한 법계입니다. 이 여여한 법계에 비유(非有) 비무(非無)의 아(我)가 계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어떤 고정된 관념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그 고정된 관념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관념을 유지하려고 안간 힘을 다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유아(有我)를 유지하려는 의지인 것입니다. 유아(有我)를 유지하려는 의욕이 강할수록 세월이 흐르면서 실망도 더 크지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고정된 관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고정된 관념을 놓아 버려서 비유아(非有我)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꾸준하게 노력하여 고정된 관념을 버리어 비유아(非有我)가 되면 남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모두가 우리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남이라고 하는 개념이 무너질 때 내 것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모두가 우리고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상 인상하는 인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수많은 종류의 동물이 살고 미생물이 살고 또 수많은 종류의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 외 어느 동물 어느 식물이 이 우주의 어느 곳 어느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합니까. 인간 이외에 어떠한 동물도 어떠한 식물도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생명이 바로 자기 옆에 자리 잡고 싹이 터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서로 방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묘한 이치를 알고 행하고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배타적인 의미를 갖는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그 소유욕을 채우기 위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일요일에 절에 나오는 것을 이러한 이유로 등한시하면서까지 뛰어 다닙니다. 이렇게 사는 생활 관념은 결국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비유아(非有我) 이러한 나는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나는 내가 될 수 없다고 발심하여 참된 자기를 찾아 나설 때, 이와 같은 내가 여여(如如)에 계합하는 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수행을 해서 이와 같은 아(我)로 발전되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聞)]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듣는 것은 부처님의 법(法)을 듣는 것이므로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떠한 귀일까요? 유아(有我)도 아니요 무아(無我)도 아니라고 하였으니 듣는 이가 누구인가. 유아(有我)는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므로 소리의 장난에 놀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유아(有我)의 수준이므로 들어서 좋은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나를 유아(有我)라고 합니다. 들어서 좋은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갖기 위한 행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행동은 그것을 만족시켜 줄 때도 있고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만족시켰을 때 기쁨이 일어나고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때 불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항상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요 그 불만도 나를 항상 불만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였던 그것이 실다운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허망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 듣는 순간 우리는 허망한 것과 실다운 것을 분간할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허망한 것을 좇아가는 것을 우치(愚痴)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아(無我)는 듣는 이가 없으니 무엇이 들을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낳습니다. 위에서 “아(我)”는 곧 “성(性)”이라고 하였습니다. 내외 동작이 다 이 성(性)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다 들을 때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고요한 가을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이 듣는 것인가, 듣지 않는 것인가? 듣는 이가 성색(聲色)에 구애됨이 있었으면 “업(業)”이 들은 것이요, 구애됨이 없었으면 “성(性)”이 들은 것입니다. 듣는 이의 마음이 산란(散亂)하면 유무(有無) 중에 타락한 것이요, 허(虛)하고 한가(閑暇)로우면 유무(有無)에 타락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색(聲色)에 구애됨이 없이 정(情)에 구애됨이 없이 한가로이 듣는 것을 여기에서 [문(聞)]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성(性)이 듣는 것입니다.


[一時]는 “어느 때” 혹은 “한 때”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나 집합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일시(一時)」라고 한 뜻을 조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一)」에는 모든 것이 따라다닙니다. 1 더하기 1은 2이고, 2 더하기 2는 4, 4 더하기 4는 8입니다. 8의 근본은 4이고, 4의 근본은 2, 2의 근본은 1입니다. 그러므로 8의 참된 근본은 4도 아니고 2도 아니며 1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佛家)에서는 2, 4, 8의 숫자는 허(虛)한 숫자이고 오직 1만이 실재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만억(千萬億)의 숫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모두 가짜로 세워진 허망한 것이고 오직 「일(一)」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만억(千萬億)의 천만억 배가 넘는 수자라고 하더라도 「일(一)」에서 비롯되지 않은 수가 없고 또 어떠한 숫자에도 「일(一)」이 나타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숨어 있지 않는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2라는 수에는 1이라는 숫자가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이 없이는 2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2에 1이 없는 것이 아니라 1은 숨고 2가 들어 난 것입니다. 만약 2가 숨는다면 1, 1이 두 개 들어 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이치가 3, 4, 5, 6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천백억(千百億)의 숫자도 그 숫자 안에 1이 숨어 있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천지(天地)가 나뉘기 전에 「일(一)」이 있었고, 「일(一)」에서 천지(天地)가 나누어지고, 천지에서 삼라만상이 전개되었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삼라만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삼라만상은 천지에서 비롯되고 천지는 하늘과 땅이 나뉘기 그 이전에 「일(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一)」은 천지 삼라만상에 모두 스며들어 있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은 모두 변하는 것이고 변하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일(一)」이 만물의 근원이요 천지(天地)의 근본이며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존재하는 실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법성게』에서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일중일체(一中一切)라고 하는 것은 「일(一)」이 모든 일체(一切)를 포섭하고 있으므로 「일(一)」을 지나가거나 「일(一)」밖에 있는 것은 이 법계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만물은 이 「일(一)」에서 나왔고 이「일(一)」이 일체 만물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것 가운데 이「일(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아무리 많은 천만억의 숫자라고 하더라도 「일(一)」이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숨어 있지 않는 숫자는 없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숫자 가운데에도 「일(一)」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기(大氣) 가운데 삼라만상이 있고 삼라만상 가운데 대기(大氣)가 스며 있지 않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몸 안에 공기가 들어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천지와 삼라만상은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유형(有形)이요 「일(一)」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무형(無形)이요 적요(寂寥)한 것입니다. 이 자체가 무형(無形)이요 적요(寂寥)하기 때문에 어떠한 유형(有形)에도 어떠한 소란(騷亂)함에도 평등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一)」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 유형물(有形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이 그들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一)」은 능히 만상(萬像)의 주(主)가 되고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 불모(佛母)가 된다고 합니다. 이 「일(一)」을 이와 같이 요달하게 되면 어떠한 일에도 원통(圓通)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종교에서는 이 「일(一)」에게 어떤 신(神)의 이름을 붙여 전능하신 창조주로 모시고 이 「일(一)」을 성부(聖父)라고 부르며, 이 「일(一)」에서 삼라만상이 출현한 것을 인격화하여 성자(聖子)라고 부르며, 이「일(一)」에서 나투는 여러 가지 작용을 성신(聖神)이라고 이름하여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세웁니다. 그리고 이 성부(聖父)를 하느님 혹은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며 삼라만상의 창조주로 모십니다.


불교에서는 이「일(一)」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우주의 진리이며 이 진리는 어떠한 유일신(唯一神)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은 오직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며 이 진리는 부처님 오시기 전에도 있었고 불멸후에도 항상 여여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진리의 법과 이 법을 배워 남을 위하여 설하는 그의 제자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격화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 스스로 범부였음을 자처하고 그와 같이 수행하면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49년간 부처님은 그의 제자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전념하셨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에서도 1,250아라한이 등장합니다. 아라한이라고 하면 모두 이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입니다.


이 「일(一)」은 부부(夫婦)사이에도 통하는 정의(定義)입니다. 우리는 고래로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었고 여자는 땅에서 나왔다고 믿어왔습니다. 앞에서 「일(一)」에서 천지가 나왔고 천지(天地)가 나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부부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부사이에서 이 귀중한 「일(一)」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夫婦)가 항상 말로는 부부일체라고 하면서도 막상 생활을 하다보면 부부일체라기 보다 편의에 따라 일체이기는 하지만 참다운 의미에서 일체가 아닌 부부개체(夫婦個體)인 부부가 많습니다. 부부가 편의주의에 빠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관계로 전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한국 커뮤니티(community)에서도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입증하여 주고 있습니다.

불교는 그 생활자체가 불교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활 따로 있고 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부부사이에서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인색한 마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서 인색한 마음을 오히려 버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족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가족을 편의주의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부부라는 두 개체가 각각 완전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버리도록 수행하며 살아가는 도중 두 사람이 모두 이를 성공적으로 버릴 때 부부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무너지고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천지가 나뉘기 전의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인색함을 완전히 버릴 때 자기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일(一)」을 본다는 의미이고, 곧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함께 수행하여 모든 벽이 무너진다면 이것이 곧 견성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一)」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 자리입니까.


요즈음 참선수행이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참선의 궁극적이 목표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닫고자 함에 있습니다. 이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내가 없으니 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없고 남이 없으니 내 것이 있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남을 위하여 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하나인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와 내가 나뉘기 이 전의 세계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지가 나뉘기 이 전의 「일(一)」의 세계로 모든 만상의 근원(根源)의 세계로 돌아간 것입니다.


「시(時)」는 때를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부처님과 제자가 기수급고독원에서 만났을 때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했을 때를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을 때는 때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을 마셔서 차고 더운 것을 알았을 때, 복숭아꽃이 피고 살구꽃이 필 때를 의미하고 시카고에 눈이 왔을 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 세상을 떠날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시(時)」는 이러한 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時)」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념(一念)에 무량겁을 가기도 하고 무량겁이 일념(一念)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삼매(三昧)에서 이 「시(時)」와 공간(空間)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삼매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동서남북이 절대적이 아니듯이 이 「시(時)」도 절대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50세 100세를 살았다고 하는 것이 범부적인 시간관념으로는 중요할 수 있지만 불교적인 시간관념으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 시간마다 어떠한 삶의 경험을 하면서 윤회하느냐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에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불(佛)]은 『금강경』을 설법하는 설법 주(主)입니다. [불(佛)]은 범어이며 우리나라 말로는 각(覺)입니다. 각(覺)에는 본각(本覺) 수분각(隨分覺) 상사각(相似覺) 범부각(凡夫覺)이 있습니다. 범부각(凡夫覺)이란 수행자가 인과법(因果法)을 깨닫는 정도의 수준입니다. 인과법(因果法)을 깨닫는 과정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되고 인과법의 두려움과 인과법이 주는 희망을 얻어 더 높고 깊은 발심을 하게 되는 큰 동기가 됩니다. 상사각(相似覺)이란 삼라만상이 정말 공(空)한 것을 체험하게 되고 그 경험 속에서 새로운 우주관이 성립하게 됩니다. 이 우주관이 본인의 경험에서 새로운 것이고, 진리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했지만 진리 자체는 아니고, 진리에 유사한 것이라고 하여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합니다. 수행상에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은 모두 높은 경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수분각(隨分覺)은 부분적(部分的)이나마 참다운 각(覺)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삼라만상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니 모두 공(空)하였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업(業)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니 업(業)을 공(空)하게 하는 단계에 진입(進入)한 것입니다. 이 단계를 성스러운 수행자의 계위라고 하고, 성위(聖位)에 오르신 수행자를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로 공경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업장을 소멸하는 흐름에 들어왔다는 입류(入流)라는 뜻을 가진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한 수행자가 수분각(隨分覺)을 이룬 수행자로 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스님들이 이 수분각(隨分覺)을 체험함으로써 모든 대중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수 있고 삼보(三寶)로써 공경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각(本覺)은 『화엄경』에서는 이 수분각(隨分覺)을 열 개의 수행단계로 나누어 이 열 단계를 성만(成滿)하였을 때 부처의 깨달음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티끌이 없는 적적요요(寂寂寥寥)한 경지를 체험하게 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내외가 모두 적막(寂寞)하여 시간도 공간도 모두 초월한 세계입니다. 아무런 티끌이 없는 적적요요(寂寂寥寥)한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 외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그것을 「일(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一)」을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실재하는 불(佛)이고 응신(應身) 화신(化身) 부처님은 비진(非眞) 참된 부처가 아니라고 『금강경』에서 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적적요요(寂寂寥寥)한 이 「일(一)」외는 모두가 비진(非眞)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 「일(一)」이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스며들어 있으므로 누구나 이 「일(一)」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일(一)」로 돌아가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표현하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 「일(一)」의 성품을 불성(佛性)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어렸을 적 이름은 실달(悉達)이고 장호(長號)는 석가(釋迦)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마군(魔郡)들로 하여금 사(邪)된 마음을 돌려 정(正)에 들게 하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화의(化儀)를 갖추었습니다.

비록 이 같으나 묘(妙)한 상(相)은 무형(無形)하고 참 이름은 글이 없습니다. 위의하고 당당하며 만법(萬法) 중의 왕이십니다. 32상을 하시고 백천(百千) 종의 빛이니 성인(聖人)과 범인이 다 우러르고 외도(外道)가 돌아와 항복했습니다.

자용(慈容)을 뵈옵기 어렵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원(祇園)대도량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在)]는 처소를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부처님께서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 처소를 정하시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있다’ ‘존재’한다고 하는 「재(在)」를 우리 불가(佛家)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두면 경문(經文)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가 지금 도서관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지 않고 망상을 피우고 있다고 하자.’ 내가 지금 도서관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 하자니 마음은 도서관에 있지 않았고 없다고 하자니 몸은 도서관에 있었다. 몸과 마음 양자 중 택일을 해야 한다면 몸이 나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마음이 나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는 도서관에 있지 않았다.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바로 이 「재(在)」의 해석에 있습니다.

우리가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할 때 일념으로 자기 마음을 관합니다. 그러면 자기 집안일이나 직장 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집안일이나 직장 일에 마음이 쏠리면 일념으로 참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우리들의 수행이지만 참선에서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우선 마음을 적적(寂寂)하게 하여 집안일을 관조(觀照)하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참선과 집안일이나 직장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선방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보고, 마음이 집안일을 보면서 선방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성취할 때, 적(寂)과 조(照)가 둘이 아니요 체(體)와 용(用)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여기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서 어느 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의 존재를 잊지 아니하고 수행에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 일반 사회인들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적조(寂照)와 체용(體用)의 불이(不二)의 이치에 있습니다. 아무런 망상 없이 공부에만 일념 한다든지, 연구하고자 하는 일에만 일념 한다면 이것이 적조(寂照) 혹은 체용(體用) 불이(不二)를 이룬 것입니다. 그 안에 내가 적(寂)이면서 조(照)로 존재하고 조(照)를 하면서 적(寂)으로 써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체(體)와 용(用)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희구(希求)하는 나의 존재 형태입니다.


[사위국(舍衛國)]은 불타의 외호자(外護者) 파사익왕(波斯匿王)이 거주하는 나라입니다. 코살아 국의 수도로 지금의 곤다주(州)에 있는 사혜트마혜트입니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Jetavananathapindadasya-arama]: '기(祇)'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의 태자(太子) 제타(Jeta) 기다(祇多)의 기(祇)이고; ‘수(樹)’는 제타(Jeta)의 숲 바나(vana)입니다. 급고독(給孤獨)은 사위성의 장자(長子)인 수달다(須達多)의 이명(異名)입니다. 고독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 (Anathapiodika)를 의미합니다. 원(園)은 아라마(arama)이고 정원(庭園) 혹은 임원(林園)이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인즉 수달다(須達多)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해 정사(精舍)를 지어 바치려고 땅을 구했는데 마침 기다(祇多) 태자의 임원(林園)을 후보지로 잡고 이를 사려고 태자에게 청했으나 태자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수달타가 워낙 간청하는 바람에 “그러면 이 땅에 금을 다 깔면 준다”해서 수달다가 두말없이 금을 까니 태자는 곧 이를 주고 또 그 정원에 있는 무수한 나무까지 함께 주었다는 사건에서 연유된 이름으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약해서 기원(祇園)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세운 정사(精舍)이므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상충되는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다 태자의 인색한 마음이고 하나는 수달다 장자의 후한 마음입니다. 기다태자는 인색하여 그의 임원에 부처님이 거하실 정사를 지어 부처님에게 희사할 목적으로 그 대지가 필요하다고 수달다 장자가 간청하였어도 그는 계속 'No'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수달다 장자의 마음을 떠보려고 그 대지에 금으로 깔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여기에 두말하지 않고 수달다 장자는 그 조건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다’ 태자는 오히려 감복하여 그의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고 그 대지에 있던 모든 수목을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시기에 이 장자가 이렇게까지 정성을 바치나 하고 부처님께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그도 부처님께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달다 장자의 후한 마음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급고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진 장자이지만 부처님께 공양 올릴 정사(精舍)를 세울 때 항상 최상품으로, 그리고 흥정을 하지 않고 재료를 사서 공급하여 정사를 완성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정신은 후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계승되어 지금까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준비하는 전통적인 관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점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항상 최상품으로 하되 흥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與)]는 부처님이 비구와 함께 금강반야의 무상도량(無上道場)에 거주(居住)하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이니 바야흐로 노래하고 화합(和合)함을 이루게 됩니다.


[대비구(大比丘)]는 아라한(阿羅漢)을 의미하며, 비구(比丘)는 범어입니다. 우리말로는 육적(六賊)을 능히 파한다는 뜻입니다. 육적(六賊)이라고 함은 여섯 가지 도적입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도적, 귀로 들어오는 도적, 코로 들어오는 도적, 입으로 들어오는 도적, 몸으로 들어오는 도적, 마음으로 들어오는 도적을 능히 파하는 출가자입니다. 그러므로 비구(比丘)는 음(婬)을 능히 파해야 합니다. 음행(婬行)을 파하지 못하면 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위 대처승(帶妻僧)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비구(比丘)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 승단은 비구(比丘)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엄한 불음계(不婬戒)에 개차법(開遮法)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개차법(開遮法)이란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비구(比丘)가 어떤 사연이든 간에 음욕(婬欲)으로 고민하게 되면 그의 은사(恩師)에게 그 사연을 이야기하고 가사를 반환하고 속퇴(俗退)하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몸으로 세상을 즐기다가, 혹 속퇴한 것을 후회하고 참다운 비구가 되고자 하는 뜻이 세워지면 그 은사에게 찾아가 재출가의 뜻을 고하면 그 은사가 받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가사를 수하면서 불음계(不婬戒)를 범하면 승단에서 징계받아 속퇴되면 다시 출가를 받아 주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스님은 불음(不婬) 계를 범하였고 전의 스님은 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당시 승단(僧團)에 의하면 비구는 처(妻)와 생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행(婬行)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계율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계승하고 있습니다.  


[중(衆)]은 많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은 수입니다. 야사가 대리고 부처님께 귀의한 50인과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대리고 부처님께 귀의한 200인과 가섭존자가 대리고 부처님께 귀의한 1000명을 합하면 1,250인이 됩니다.


[구(俱)]는 평등법회에 함께 계신 것을 뜻합니다. 주인과 객이 교감하고 설함과 들음이 함께 모임입니다. 부처님과 1,250 아라한이 모두 평등하게 모여 함께 법회를 진행함을 의미합니다.


[이시(爾時)]는 당한 시간을 말합니다.


[세존(世尊)]은 지혜가 삼계(三界)를 초월해 능히 미치는 자가 없으며 덕이 높아 다시 위가 없어서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가 다 공경하므로 세존이라고 합니다.


[식시(食時)]는 지금의 진시(辰時: 오전 7-9시)며 재시(齋時: 10-11시)에 이르려는 시(時)입니다.


[착의지발(着衣持鉢)]은 부처라고 높고 제자라고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잠자는 일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나타내기 위하여 착의지발하는 자취를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의 스승인 것은 법상에 올라가 법을 설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주좌와의 모든 생활면에서 가르침을 보이는 것이 참다운 가르침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만 착의지발(着衣持鉢)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도 그의 제자들과 똑같이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 나가셨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발(持鉢)]: 성(城)에 들어가기 위하여 발우(鉢盂)를 가지는 것은 진실로 빈궁의 슬픔을 연민하는 것을 말미암는 것입니다.

발우는 우리들의 밥그릇이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을 받아주는 그릇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음식에 담긴 그들의 고통을 스님들이 거두는 그릇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입(入)]은 성(城)밖에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위대성(舍衛大城)]은 사위국(舍衛國) 풍덕성(豊德城)으로 파사익왕(波斯匿王)이 거(居)하기 때문에 사위대성이라고 합니다.


[걸식(乞食)]은 스님들이 음식을 빈다, 음식을 구하려고 이 집 저 집 다닌다는 의미입니다만, 참 뜻은 공양을 시주하는 시주자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받아 옴으로서 시주자의 고통과 슬픔이 소멸하고 시주자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래가 능히 일체 중생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하심(下心)함을 표합니다.


[차제(次第)]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으로 어려운 중생을 교화(化)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주자의 고통과 슬픔을 받아 옴으로서 시주자의 고통과 슬픔이 소멸되고 복을 짓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스님들이 시주물이 좋은 부자집이나 그렇지 않는 가난한 집을 평등하게 방문하도록 한 규칙입니다.


[걸이(乞已)]는 일곱 집 걸식을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적은 량의 공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일곱 집을 넘지 않는 것이며, 일곱 집만 되면 다시 다른 집에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공양물을 받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자기가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받지 않겠다거나 조금만 달라거나 할 수도 없습니다. 시주자의 마음을 스님들이 받아 오는 것이기 때문에 스님들은 다만 주는 대로 받도록 부처님 때부터 관례로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시주자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조항이 부처님 돌아가신 후, 100년이 지나는 동안에 큰 문제로 발전하였습니다. 큰 도시에서 상업과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통화, 돈이 보편적으로 유통하게 되어, 걸식을 하러 나온 스님들에게 시주자들이 돈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스님들은 시주자들이 주는 대로 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젊은 스님들이 돈을 당연한 시주물로 생각하고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노스님들은 젊은 스님들에게 돈을 받지 못하게 제재를 가하고, 젊은 스님들은 부처님의 계율에 어긋남이 없다고 주장하며 노스님들이 돈을 받지 말라고 하는 지시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노스님들도 젊은 스님들이 시주자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어느 계율을 범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내 세울 계율 조항이 없었으므로 처벌할 수 없었고  다만 부처님의 설법 정신에 따라야 한다고 밖에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통화의 유통이 더욱 활발하여 지고 시주자도 돈으로 시주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인식과 함께 점점 많은 젊은 스님들이 돈을 시주로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걱정한 노스님들이 제2회 결집을 소집하여 결집에서 이 부분의 계율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것은 스님은 돈을 만질 수 없다. 돈을 만져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평신도 시자를 한 사람 꼭 데리고 다니고 돈은 그 시자가 받아 보관하고 스님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 시자가 물건을 사서 스님에게 드리게 되어 있고, 스님이 가질 수 있는 물건도 가사와 내복 세 벌 이상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혹 시주자가 있어 세 벌을 넘게 되면 세 벌이 넘는 옷은 그 시자에게 맡겨 두고 필요할 때 달라고 해서 쓰고, 쓰고 난 다음에는 다시 그 시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엄한 계율에 많은 젊은 스님들은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일축하여 버렸습니다. 경전에 보면 비불설(非佛說), 부처님 설이 아니다라는 구절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양측에서 비불설(非佛說)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젊은 층을 대중부(大衆部)라고 불렀고 노스님 측을 상좌부(上座部)라고 불었는데 서로가 비불설(非佛說)이라는 설로 맞섰습니다.

후에 대중부에서는 돈을 받고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살아 계실 때로 돌아가 보살행(菩薩行)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보살행을 하는 자기들은 대승불교라고 하고 보살행을 하지 않는 상좌부를 소승불교라고 깎아 내리는 맹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대승불교권에 속합니다.

이 후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대승불교 권에서 중국 불교가 부패하지 않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장개석 정부가 부패하였었기 때문에 모택동에게 망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일본 불교도 부패하여  스님들이 장가가서 살림하면서 스님생활을 하는 소위 대처승(帶妻僧) 제도가 확립하였습니다. 참고 하셔야 할 것은 대처승은 승자(僧字)를 편의상 붙이기는 했어도 비구(比丘)는 아닙니다. 비구는 육적(六賊)을 파하는 스님이기 때문에 음행은 절대 금물이라고 전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음행을 하는 즉시 승복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대만이 대승권으로서 비구스님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방불교에 대하여 한국이나 미국에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방불교가 우리가 소위 소승불교라고 알고 있는 상좌부 불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방불교 스님들 중 돈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이 계율을 몰래 범하는 스님이 없지 않겠지만 주류 승가 사회는 이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왔기 때문에 승단의 부패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엄한 계율하에 스님들은 오직 수행 위주의 승가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고 미얀마와 같은 철저한 군인 정치가들도 승단을 존중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 불교가 군 정부하에서도 잘 유지하여 오는 원인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부패하였다면 군 정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이를 이유로 삼아 불교를 배척하거나 여지없이 탄압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지본처(還至本處)]는 부처님의 뜻으로 모든 비구를 제재한 것으로 소청(召請)을 제하고는 속가(俗家)에 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볼 일 없이 여기 저기 다니는 것을 금하고 있는 조항입니다. 심부름을 보내면 그 볼일을 보고 나온 김에 다른 곳을 다녀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른 일을 보지 말고 본처로 바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수행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세족(洗足)]은 여래도 범부와 같이 발을 씻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대개 수족을 씻는 것은 마음을 정(淨)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일념으로 마음을 밝게 하면 곧 죄구(罪垢)는 없어집니다. 그래서 발을 씻을 때 곧 일념으로 마음의 때도 함께 씻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부좌이좌(敷座而坐)]는 여래가 설법하시려 할 때에는 항상 자리를 펴고 앉았기 때문에 부좌이좌(敷座而坐)라 했습니다. 설법하실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제일분(第一分)에서 경전편집의 육가원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다는 신(信), 들어서 적었다는 문(聞), 설법한 시(時), 설법 주(主), 설법한 처(處), 모인 대중입니다.


그리고 제 일장 법회인유분에서 부처님이 기수급고독원에서 대비구들과 함께 계셨고 때가 되어 부처님과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 걸식를 하셨습니다. 걸식을 하실 때 그 사위대성에서 차례로 걸식을 해 마치시고 본처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시고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시고 앉으셨다고 설하는 것은 부처님의 높으신 수행의 도를 평범한 생활 속에 그대로 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과 부처님, 부처님과 대중스님들, 부처님과 사위대성에 살고 있는 시민들, 누구에게나 평등한 마음으로 자비의 연민의 정으로 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평상심을 떠나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는 부처님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세수하고 기도하고 아침 먹고 직장에 나가고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식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내일 할 일 준비하고 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이켜 보면 사실상 그 때가 행복한 시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식구 중에 병든 사람이 생기든지 하는 사업이 위험한 고비를 당하게 되면 순조롭던 생활이 이지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모든 식구들의 건강을 위하여 신앙생활의 평정을 위하여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평온이 선행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평상심이 바로 도이고 평상심 밖에서 도를 구할 수 없음을 깊이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평상 생활 속에서 행복한 줄 모르게 행복한 것이 참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다른 곳에서 구하려고 하면 오히려 파탄이 오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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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금강경]2.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는 참이 아니다) 여해 2007.03.01 15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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