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第二十三  (청정한 마음으로 선(善)을 행하다)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는 마음으로 일체 선(善)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證得)하리라.

수보리야, 선법(善法)이라고 말하는 바는 여래가 곧 선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 이름이 선법(善法)이다."라고 하셨다.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는 마음으로 일체 선(善)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證得)하리라.


앞 장의 문장을 다시 생각하여보면 이 장의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 2l장에서 “여래가 설법할 것이 있다고 생각 한다”면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고 하신 것은 체상용(體相用) 중 상(相)을 설하는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고 보면 중생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중생이 곧 여래인데 여래가 중생에게 설법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래가 보는 중생이라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가 중생에게 설법할만한 자료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뒷밭침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피비중생(彼非衆生) 비불중생(非不衆生)”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신 것이다. 중생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법신불이라는 뜻이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법신불이 아니라는 것이니 보신불과 화신불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하였다.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법신불로 해석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있는 여래가 중생을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생이 법신불이라는 것은 곧 청정한 법신이라는 의미이고 청정한 법신을 인격화 하면 곧 법신불이기 때문이다.

이 장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을 생각하여 보면 이 제 21장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은 증도(證道) 게송이라고 생각된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설하는 문장이다. 즉, 법신의 상(相)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제 22장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될만한 것이 없느냐’고 수보리가 묻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하시며 수보리의 말을 인가하시는 것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보니 중생의 원래의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생의 원래의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새롭게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체상용(體相用) 중 법신의 상(相)을 설명하는 것이다. 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이 병이 나았다고 하여 건강을 새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나쁜 습관으로 망쳐진 건강을 나쁜 습관을 버림으로서 원래의 건강한 자기 모습으로 회복하였다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건강한 몸의 상(相)으로 돌아온 것이다. 방 안에 물건이 가득 차 있어 갑갑하게 느껴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도록 물건을 모두 치워버리고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였다고 하여 햇빛이나 공기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햇빛과 공기가 원래 잘 통하던 것을 내가 물건을 갖다 놓음으로서 막았던 것이니 실로 새롭게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 22장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역시 증도(證道) 게송이라고 할 수 있다. 도를 증득하였을 때 어떠한 현상으로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는 장이다.

이제 제 23장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서도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라고 한 부분도 상(相)을 설명하는 것인 동시에 증도 게송이라고 생각된다. 시법(是法)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신불에 대한 법이다. 법신불은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다고 하는 것은 법신불의 상(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한 것이다.

제 21장에서 여래가 중생에게 설할 법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여래와 중생이 평등한데 무엇을 설할 것이 있느냐고 하는 평등사상이다. 중생과 부처에 상하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평등사상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에서 시법(是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청정한 법신불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는 상(相)이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을 의미한다. 일체중생이란 미물에서 고등 동물에 이르는 일체 생명체에 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 법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의 근본이 법신이고 그 법신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상(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계가 더하고 덜함이 없듯이 모든 생명체에 내재한 법신의 입장에서는 축생이라고 하여 덜함이 없고 성인(聖人)이라고 하여 더함이 없으며 어리석다고 하여 짧음이 없고, 예와 지금에 다름이 없고, 멀고 가까움도 차이가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으며, 선하고 악한 것도 없으며, 생과 멸도 없다. 얻음도 없고 함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닦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신의 상(相)이다.

이는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마음의 근본 체(體)를 깨달아 알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마음의 근본 체를 법신이라고 말하고 법신이 가지는 성질을 상(相)이라고 한다. 이는 청정한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체(體)의 입장에서 위와 같이 관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집착과 분별하는 마음을 모두 비웠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옛 선사들이 ‘처처가 법당이니 곳곳에 부처 아니 계신 곳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체(體)의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용적(用的)인 입장에서는 길고 짧음이 있고, 굵고 가는 것이 있으며, 멀고 가까운 것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 체(體)의 의미와 용(用)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여 항상 중도를 지켜가야 하는 것이 불교의 평등사상이다. 체와 용의 중도사상을 아래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하라는 것은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깨달은 체(體),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를 하여 깨친 근본, 본각(本覺)을 실제 생활상에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즉 보림하라는 것이다.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이라고 하는 것은 병든 사람을 돕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착한 법이지만 수 없이 많은 착한 법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착한 법은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인연된 사람들을 편안하게 그리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 일체선법(一切善法)을 닦는 것이다. 이 맡은 바 책임과 의무가 곧 불사(佛事)이고 가정과 직장이 곧 수도도량이 되는 것이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인연된 중생들을 편안하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불사행동(佛事行動)이요 불사행동이 곧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모든 중생을 편안하게 하고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평등한 것이다. 처처법당(處處法堂)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는 뜻이 이러한 것이다.

그 직분(職分)의 고하(高下)는 체(體)에서 볼 때 고하가 없다는 것이고 용(用)의 입장에서 고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체(體)의 입장에서 볼 때 누구나 천부적(天賦的) 지혜와 능력이 있지만 용(用)의 입장에서 보면 각자의 업에 따라 일을 감당하는 지혜와 능력에 차별이 있다. 그러나 각자에게 천부적 지혜와 능력이 평등하게 있기 때문에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일을 감당하는 지혜와 능력을 계발(啓發)할 수 있다는 것이 체(體)가 갖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연고로 각자가 속하는 가정과 직장을 각자의 수행도향으로 알고 지성으로 처처법당 사사불공에 임하여 행동하면 지혜와 능력이 계발되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혜는 이지불법(理智佛法)이 되고 능력은 행동불법(行動佛法)이 되는 것이다. 이 이지불법과 행동불법을 쌍으로 닦아야 최상승자(最上乘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최상승자(最上乘者)를 위하여 『금강경』이 설하여 진 것이니 최상승자는 항상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금강경』의 뜻에 따라 이지(理智)와 행동을 수행하여 수행이 활구수행이 되고 일용법(日用法)이 되고 보림법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금강경』의 뜻에 따르는 것은 체적인 면에서나 용적(用的)인 면에서 사상(四相)을 여의는데 있다.

사상을 여의기 위하여 『금강경』에서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념(無念)을 설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체의 면에서 이해되는 것이고 용의 면에서 보면, 남이 내가 하는 일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나 남이 내가 할 일을 대신 하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내가 잘못한 것을 숨겨주기를 바라는 등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아상이다. 남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나 남을 속이는 것을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이나, 남이 자기가 한 일이 잘 한 것이라고 과시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등 남의 허물을 잡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을 속여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정당한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남은 다 잘사는데 우리만 못산다고 생각하거나 남에게 주는 것은 아깝고 받는 것을 좋아 하거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애욕에 집착하는 마음은 중생상이다. 이러한 사람들 보다 내가 인격자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러한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면 수자상이 된다.  

이러한 사상(四相)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는 지혜와 능력을 계발하는데 장애가 된다. 이러한 사상을 여읠 때 책임을 수행하는 지혜와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자리와 이타를 할 줄 아는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는 것은 앞 문장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가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깨침을 얻은 것이니 이것은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다. 돈오하여 마음의 근본과 우주의 근본을 깨친 것이다. 이 근본인 체가 곧 용(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체(體)를 깨달았으니 그 체가 용(用)이 되도록 일체선법을 위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보림이라고 하는데 보림에서 관심법(觀心法)에서 여의었다고 생각되는 사상(四相)이 확실히 여의어졌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관심법 수행자의 경우 사상을 완전히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선법을 수행함을 통하여 사상을 여의어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념(無念)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상(四相)을 여의일 때 관심법 수행에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다시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체의 입장에서 볼 때 법신불이라 하고, 용의 입장에서 볼 때 보신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을 점수(漸修)라고 한다. 앞의 돈오(頓悟)와 합치면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수하항마를 하였을 때 사상을 모두 여의었으므로 특별한 생활상의 보림이 없었다. 이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는 것은 몰록 깨친후 즉시 깨친대로 행할수 있는 것이다. 깨친 것은 체(體)이고 행하는 것은 용(用)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는 것은 깨치기는 했으나 깨친 대로 바로 행동이 되지 않을 경우 차츰차츰 깨친 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담배나 술이나 노름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담배나 술이나 노름을 끊은 사람은 돈오돈수(頓悟頓修)에 해당하고, 몸에 해롭다는 것은 깨달았으나 곧바로 끊지 못하고 점차 노력한 결과 끊은 사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해당한다.      

이 23장에서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관심법(觀心法)에 의하여 시법평등무유고하(是法平等無有高下)라고 하는 체(體)의 상(相)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깨달음의 현상이고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선법(一切善法)을 행동으로 닦는 용(用)에서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었을 때 얻어진 깨달음의 현상이다. 사상이 없는 일체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사상이 없는 일체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바 일을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일하는 장소를 처처법당(處處法堂)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와 인연된 모든 부처님들을 편안하게 하여드리고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여래의 지혜와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의 길로 가는 것이고 일체선법을 닦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이와 같이 산다면 모는 부정부패를 씻은 듯이 없애고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야, 소위 선법(善法)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곧 선법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고 하셨다.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 시명선법(是名善法)에서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라고 하는 것은 선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체(體)의 입장에서는 청정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는 것인데 선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곧 청정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즉 청정하지 못한 것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의 입장에서는 선하다 악하다고 하는 분별을 용납하지 않으니 선악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이라고 하여 부처님께서 선한 법이 아니라고 하신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용(用)의 입장에서 보면 선한 법을 닦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고 한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불교에서 체상용(體相用)의 설법이다. 이 체상용의 용법에 혼란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기만 한 것이다. 사실 너무나 정확하게 질서 정연한 논법을 쓰고 있는 불법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처처에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하면 이는 근본, 즉 체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니 용(用)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들의 근본이 그러하니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중생마다 부처로 생각하고 대하게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시명선법(是名善法) 이름하여 선법이라고 한다는 구절은 용(用)의 입장에서 선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용의 입장에서 선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정된 선법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인에게 빨간 장미꽃을 선물하여 주니 참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부인에게 빨간 장미꽃을 선물하는 것이 선한 법이라고 고정관념을 세우고 매일 빨간 장미꽃을 사 들고 가면 부인이 거부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국수를 좋아한다고 매일 국수를 해서 받치면 국수가 물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선법이라는 것을 꽃이나 국수라는 물건에 두었기 때문이다. 선법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여 주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니 어제는 꽃으로 편안하게 하여 주었지만 오늘은 무엇이 부인을 편안하게 하고 이익 되게 하는 지는 잘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 마치기 위하여 우리는 끝임 없이 우리에게 원래 존재하는 여래의 지혜와 능력을 인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을 상대할 때나 남을 상대할 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 사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꽃을 선물했다는 상을 내려고 하거나 상대방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아직 사상을 여의지 못한 것이요, 꽃을 받을 때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아상을 여의면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의 허물이 보이지 않고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책하려고 하지 않고 부인이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같이 괴로워하면 인상이 없는 것이다. 아상 인상이 없는 사람이 재물이나 명예욕이나 애욕이 있을 리 없고, 혹 있다면 아상 인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중생상도 있는 것이지만 아상 인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중생상이 설 자리가 없다. 중생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재물과 명예와 애욕이 선악을 분별하는 측도가 될 수 없고 선악의 분별심이 없어진 사람은 수자상도 없어진 사람이다. 수자상을 여읜 사람은 선법이다 악법이다 하는 것을 여의지 아니하고도 자기의 청정한 자성을 나투게 된다. 청정자성이 나투게 되는 것은 곧 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용의 입장에서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건너가는 방편인 것이다. 그리고 저 해안은 항상 편안하고 이익이 넘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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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he Diamond Prajnaparamita Sutra / Translation and Commentary (hwp, pdf) file 현성 2011.11.12 1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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