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큰 법문을 하시는 날에 수많은 대중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 모였다. 부처님께서는 법문은 안하시고 아무 말씀 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다. 대중들은 그것을 보고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그 자리에 대중들과 함께 앉아 있던 가섭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바르게 서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가섭의 이 모습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시며, “나는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은 미래세에 여러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나서 마땅히 성불하리라.”라고 하시며 수기를 주셨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正法)을 깨달은 눈의 보배창고와 열반을 체득한 미묘한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실상(實相), 즉 사실대로의 모습으로, 아무 것도 섞임이 없는 모습이나, 모습이 없는 모습이니 미묘한 법문(法門)이다. 이 미묘한 법은 문자(文字)로도 표현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말과 글 밖에 별도로 (꽃을 드는 것과 같이) 전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다고 모습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지혜가 없다고 모습 없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나 다만 인연 따라 그 모습이 증득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실상(實相)이라 함은 사실대로의 마음, 번뇌 망상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 조금도 그릇됨이 섞이지 않은 진리이다. 실상으로서의 마음이나 진리는 말이나 글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하자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기에, 마음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으니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리 작다고 하여도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으니 작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 마음이다. 이와 같은 것이 마음이고 이와 같은 것이 진리이니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말이나 글로는 사실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꽃과 같은 인연에 의해서 그 마음을 증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실상(實相)이라는 것도 말이나 글로서 사실대로 나타내고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인연에 의지하여 느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염화시중(拈花示衆) 혹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도 한다. 이 염화시중(拈花示衆), 즉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신 실상(實相)의 도리를 깨치기 위해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 참선(參禪)의 효시(曉示)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선(禪)이란 무엇인가라고 할 때 필수적으로 설명되는 경구(經句)이며 선불교(禪佛敎)의 기원(紀元)이 되는 경전(經典)으로서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유지무지(有智無智) 득인연증(得因緣證)이다.




실상을 밝히고자 하는 선 법문을 한편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해도 30방망이

가지고 온 것이 있다고 해도 30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왜 맞아야 할 까요?

이 세상에서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다고 해도 30방망이

가지고 가는 것이 있다고 해도 30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왜 맞아야 할 까요?

이것이 존재의 실상으로서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