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의 정(情)을 다 버려라

2007.09.27 18:28

현성 Views:9188

범부의 정(情)이라 함은 이성(異性)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 특히 가정에서 일어나는 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정, 부모, 자녀, 형제, 좀 더 나아가 도반간의 정, 사제(師弟)지간의 정, 그리고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애착도 범부의 정에 속할 수 있다고 본다. 정(情)에 매이면 사리(事理) 판단이 흐려지고 이성(理性)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정(情)을 끊음으로서 이성을 순결(純潔)하게 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도(道)를 닦고자 발심하는 사람들에게 출가(出家)를 권한다. 출가라 함은 글자 그대로 집을 나간다는 말인데 그 뜻은 가정사(家庭事)와 인연을 끊고, 그 표상으로 평소에 머리도 깎고 먹물 옷을 입게 하였다.

중국 송(宋)나라 때 대혜(大慧) 종고(宗杲) 선사(1089~1163)께서 그의 저서 서장(書狀)에서 출가자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일체 가정에서 일어나는 애정관계를 끊고 출가하여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애정을 끊지 못하였다면 특별히 성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뜻으로 다음 글을 남기셨다. 그 내용은 :

단진범정(但盡凡情)하여도 별무성해(別無聖解)로다. 이다. 즉,

      단지 범부의 정을 다 끊었다고 하여도
      특별히 성인을 이해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이다.

출가하여 먹물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애정을 끊지 못하였다면 출가의 본분을 이해하고 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설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정을 모두 끊었다고 해도 특별히 성인(聖人)을 이해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성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씀은 아직 성인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출가한 수행자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많다. 제일 처음에 넘어야 할 산이 감정(感情)을 극복하는 산이다. 애정을 바르게 극복하지 못하면 불만이 많이 생기고 화를 자주내고 신경질적이 되기 쉽다.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출가자는 인내심이 있을 수 없고 출가자로서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을 고요히 하여 염불을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된다. 그러나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자는 인내심이 있고, 수행자로서 출가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를 가진 것이니 성인이 되기 위한 길에 입문(入門)한 수준이다. 그러하니 성인을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더 넓고 깊은 수행을 필요로 한다.
성인(聖人)이 되려면 먼저 모든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업장이라 함은 내가 지은 업이 내가 하는 일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말씀인데, 과거나 전생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잘못된 습관이 허망하게 욕심을 부려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잘못된 편견, 사상, 성품 등으로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습관들이다. 모든 업장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욕계(欲界)를 떠나고 색계(色界)를 떠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즉 아무 것도 없는 공 도리에 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 도리에 들게 되면 편견(偏見)이 없어지므로 ‘나’라는 존재의 한계가 사라지니 일체가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이 공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능력도 지혜도 없으니, 이에서 더욱 수행하여 이 공의 도리에서 다시 지혜의 도리에 들어가야 한다. 이 무소유 다음에 일어나는 지혜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한다. 이 때 얻어지는 지혜로는 생명의 근원에 들어 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비상비비상처정에서 다시 일체 무지(無智),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모든 생명이 나고 죽는 이치와 생명을 유지하는 이치, 그리고 생명이 멸하는 이치를 깨달아 영생을 추구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그 길로 인도하는 도사(道師)가 되었을 때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된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단계가 이러하니 정(情)을 다 끊었다고 하여 성인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더욱이 성인이 된 것도 아니다.

대혜선사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
      단지 범부의 정을 다 끊었다고 하여도
      특별히 성인을 이해하였다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