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 07. 현성스님 법문 금강경 일체동관분 제18

2016.08.09 04:54

현성스님 Views:2507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第十八

(일체를 같은 것으로 보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法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 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 佛世界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저 항하강 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저 한 항하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여러가지 마음을 다 안다. 무슨 까닭이냐.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法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 有佛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성(佛性)의 묘용(妙用)을 설명하는 법문이다. 수행 중 실무유법(實無有法)에 이르러 무상(無相)과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하게 되면 진여 불성(佛性)이 현전(現前)하고. 불성의 작용이 오안(五眼)나타남을 말씀하신다.

이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성품이라 하여 불성(佛性)이라 한다.

육안(肉眼)은 육체에 있는 눈이니 범부(凡夫)의 눈이다. 범부의 눈은 빛이 없어도 보지 못하고 종이 한 장이 눈앞을 가려도 보지 못하며 아주 아까운 것도 먼 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現像)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눈이다.

천안(天眼)은 천상(天上)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다. 빛이 없어도 볼 수 있으며, 눈앞을 가려도 볼 수 있고, 멀고 가까운 것에 관계없이 볼 수 있는 눈이니,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볼 수 있는 눈이다. 그래서 수보리가 여래께서는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존재를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고 대답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란 태양계 천개를 합한 우주를 소천(小千) 세계라하고, 이 소천세계를 천배한 우주를 중천(中千) 세계라 하고, 이 중천 세계를 천배한 우주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하는데, 이 소천 중천 대천을 모두 합한 우주를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현대 과학에서 햇빛이 일년간 가는 거리를 일광년(一光年)이라고 하는데 몇만광년을 가도 우주의 끝이 없다고 하니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천안(天眼)으로 보신 우주가 가히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상에 도솔천, 도리천, 타화자재천 등 많은 하늘 세계가 있다.

혜안(慧眼)은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 등 육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눈이다.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연기하는 모습을 비춰보는 눈이다. 이를 반야지라고 한다. 중생의 고통은 연기법에 어긋나는 짓을 함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남보다 잘나야 하고, 내가 남보다 잘살아야 하며, 내가 남보다 높은 지위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업은 연기법에 어긋나는 짓이다. 연기법은 너와 내가 동시에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이치이므로 내가 남보다 잘날 수도 없고 못날 수도 없다. 일체 만유가 평등하다는 이치이고, 사유(私有)를 인정하면서도 공유(共有)를 중요시하고, 공유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사유를 인정하는 법이 연기법이다. 요즈음 세상에 문제가 되는 것이 공유를 인정하지 않고 사유만 주장하는 이기심에서 사람사이에 인정이 매말어고 돈만 있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돈도 있고 인정도 있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반야지에 의한 혜안이다.

부처님께서 천안으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의 생활하는 모습을 관찰하시고 모든 중생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며, 태어남의 원인은 집착이 있기 때문이고, 그 원인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마지막에 찾은 것이 무명(無明) 어리석음 이였다.

어리석음이란 나고 죽음이 없는 법신(法身) 즉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법신 즉 불성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이다. 혜안이 있는 자는 나고 죽음이 없는 불성을 보는 자가 바로 참 자신이고, 그 참 자신이 또 법신인 것을 아는 지혜의 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나고 죽음에 대한 분별심이 없으므로, 그 외 무엇에도 분별심으로 일으키는 집착심이 없다. 오직 사랑과 자비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할 뿐이다. 불성의 묘한 작용이다.

법안(法眼)은 법의 실상(實像) 즉 법신(法身) 즉 불성(佛性) 즉 무상(無相) 즉 무아(無我) 즉 공한 이치를 깨달아 모든 존재는 하나로 통하고 있는 법 질서를 요달한 눈이다. 겉모양[사(事)]에서 내면세계[리(理)]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며, 리(理)에서 사(事)를 볼 수 있는 눈이다. 현상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대원을 세우고, 그에 필요한 방편과 힘을 갖추어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을 제도할 모든 법의 이치를 깨달아 걸림없이 그들을 제도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다. 중생에게도 부처님과 똑 같은 불성이 있으니 이와 같은 불성의 묘용이 가능함을 설하신다.

불안(佛眼)은 불성(佛性)을 완전무결하게 요달한 눈이다. 다음 단락에서 불성을 계속 설명하신다.

부처님께서 제17장에서 실무유법(實無有法)에 대한 이치를 여러 번 반복하여 설명하시고 끝에 와서 보살은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18장에 와서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하게 되면, 오안(五眼),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을, 여래와 똑 같이, 저절로 얻게 될 것임을 보이시고 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 佛世界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저 항하강 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저 한 항하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이와 같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불성(佛性)의 체(體)는 법신(法身)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에 충만하여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하는 법신(法身)이다.

불성의 체, 법신을 부처님께서 공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다.

부처님께서 항하강에 있는 모래를 말씀하실 때는, 항하강과 그기에 있는 모래 알이 부처님의 마음, 불성, [천안(天眼)]에 들어와 있다. 즉 부처님의 마음, 불성, 천안이 항하강과 그 모래알을 포함할 정도로 넓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마음에 없는 것을 부처님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항하강의 모래 알 수만큼 많은 항하강이 있고, 그 항하강에 있는 모든 모래 알 수만큼 많은 불국토를 말씀하실 때도 부처님의 마음, 불성, 천안은 이미 그 한량없는 우주공간 속에 수많은 불국토가 있음을 보시고 그들을 포섭할 만큼, 부처님의 마음, 불성, 천안이 한없이 넓으져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법의 몸, 법신이라 했다.

금강경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지구상의 불국토 외에도 불국토가 많이 있다는 말씀이구나. 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요즈음 발달된 과학이 몇 만 광년을 가도 아직 우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정보를 접할 때, 2천 5백년 전 부처님이 가지신 천안(天眼)에 이들이 모두 포섭되었다는 증거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중생들에게 한없이 펼쳐 질 수 있는 무진(無盡)한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씀이 경이롭다.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여러가지 마음을 다 안다. 고 하셨다.

부처님의 혜안(慧眼), 불성의 작용(用)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부처님이 무상(無相), 무아(無我)에 달하여 얻은 혜안(慧眼)이다. 이 우주상에는 한 없이 많은 불국토가 있고, 그 불국토마다 한 없이 많은 중생이 있다. 그들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에서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여래는 그들을 다 알고 제도할 수 있다. 그것은 여래에게 불성이 있고, 불성에는 혜안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불성이 있으니, 발심 수행하여 무상 무아를 통달하면 여래와 똑 같이 넓은 불국토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그기에 있는 한없는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고 그들을 모두 편안과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 는 가르침이다.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무슨 까닭이냐.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다.

부처님의 법안(法眼), 불성의 작용(用)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如來說諸心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저 수많은 불국토 가운데 있는 낱낱 중생이 다 약간씩 차별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차별된 마음은 중생 수만큼 많지만, 모두 ‘나와 남’을 분별하고,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고, 예쁘고 추한 것을 분별하며, 있고 없는 것을 분별하고, 죽고 사는 것을 분별한다. 분별하는 마음은, 버리고 취하는 마음과 집착심을 낳고, 집착심은 고통을 낳는 망심(妄心)이다. 중생심은 모두 이와 같은 망심이다.

皆爲非心 다 마음이 아니다. 라는 것망심은 모두 참마음이 아니다. 참 마음은 이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원력(願力), 방편과 힘, 그리고 반야지혜를 갖춘 법안(法眼)이 열린 보살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곧 진심(眞心)이며, 불변(不變)의 마음, 불생불멸의 마음, 반야바라밀의 마음, 청정보리심, 진여불성(佛性)이다.

是名爲心 그 이름이 마음이다. 란 참 마음은 반야바라밀의 마음, 불생불멸의 마음, 진여불성의 마음이니, 이러 하기에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다. 고 했다.

이 구절은 금강경 제5품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의 법문에서 보인 논법과 같은 노법이다.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불성(佛性)의 체(體)를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다. 이것도 부처님이 체험하신 법문이다. ‘지나간 마음은 얻을 수 없다’란 앞생각은 이미 지나갔음에 찾아봐도 있는 곳이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마음에 모양 색깔 맛의 상이 없으니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또한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란 미래를 추상하는 생각은 있지만 이것은 중생심이다. 중생심이라도 미래에 일어날 일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은 없다.

부처님의 마음은 무상(無相), 상이 전혀 없는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하셨으니, 마음에 아무런 상(相)이 없다. 상이 없으니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막힘도 없다. 상(相)이 전혀 없어 일체가 끊어졌으니, 한량없는 긴 시간도 한 생각 순간 속에 들어오며, 한 생각 순간 속에 무량한 세월의 일이 들어온다. [숙명통(宿命通)]. 그러나 어느 순간을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상(相)이 없으니 처소(處所)가 없기 때문이다. 참 마음은 머무는 처소는 없으나 모든 것을 훤히 다 아는 부처님의 마음, 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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