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 


임성합도(任性合道)의 성(性)은 본성(本性)을 뜻하는 것으로 본체(本體)의 다른 이름이다. 임성(任性)은 모든 일에 임해 근심 걱정 하지 말고 본성에 맡기는 것이고, 합도(合道)는 도(道)와 하나로 합해지는 길이고, 소요(逍遙)는 근심걱정하지 않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 하루를 즐겁게 소일(消日), 즉 날을 보낼 수 있고, 절뇌(絶惱)는 일체번뇌를 단절(斷絶)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때문에 근심걱정하지 말고 자성(自性)에 맡기는 것이 대도(大道)와 합해지는 일이고, 마음에 안정을 찾고 일상생활을 여유롭게 영위하며, 일체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에 비교해서 설명하면, 불교의 자성(自性)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에 해당하고, 불교의 대도(大道)는 극락(極樂)이므로 기독교의 천국에 해당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과 천국은 우리의 몸 밖에 어디에 있다고 하니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 가운데 어디에 있다는 원리라고 생각되며, 불교의 자성과 대도는 우리의 몸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에 의지하여 작용하는 육식(六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안에 있다고 하니, 내가 내안에 항상 머물고 있는 나의 자성(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면 자성(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을 모두 잘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믿고 계속 자성(하나님)께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도(천국)와 합해지고, 이렇게 대도(극락세계)와 합해지는 과정에서 소요(逍遙)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일체 번뇌가 끊어지게 되어 구경에 대도와 합(合)이 되어 나와 자성과 대도는 분별되지 않는 합(合)이라 하니 부처를 이루었다는 말씀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천국에 간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자체는 될 수 없다고 하는 교리인 점에서 불교에서 의미하는 성(性)과 다르다.

위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즉 본체가 다 알아서 한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다.

또 양단(兩段)이 없는 것이 공(空)이고, 이 공에 만상(萬象)이 가지런히 함유(含有)되어 있다고 한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방지자연(放之自然)과 임성합도(任性合道)는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의 제함만상(齊含萬象), 즉 일체 만상을 가지런히 함유하는 주체가 곧 본체이고, 본성이며, 곧 진리인 도(道)이고, 이는 집착을 방지자연(放之自然)함으로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임성합도(任性合道)의 임성(任性)은 본성(本性)에 맡긴다는 뜻이니,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집착을 놓고 일체의 근심 걱정과 의심을 본성에 맡기고 열심히 하는 일에 정진하다 보면 그 원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여 자신을 얻었을 때 도(道)와 합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임성합도(任性合道) 중 임성(任性), 즉 모든 일을 자기의 성품에 맡기기 위해서는 우선 머리를 굴리는 생각을 끊어야 한다. 그것이 소요절뇌(逍遙絶惱) 중 절뇌(絶惱), 즉 번뇌를 끊는다는 말이고, 일체 번뇌 없이 소요(逍遙), 즉 거닌다고 했다.

그러므로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는 것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우리들의 의식으로 분석(分析)하고 사량(思量)하며 이해(利害)관계를 따져보는 습관(習慣)이 단단히 배어 있어 이 과정을 모두 놓아버리고 일체를 본성에 맡긴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앞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라는 말씀, 즉 체(體)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머물러야 할 때 가는 바가 없고, 가야할 때 머무는 바가 없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 실천해 스스로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달았을 때 방지자연(放之自然)하고, 게송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많은 세월을 두고 꾸준하게 자기의 허물을 찾아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즐거이 하는 습성이 점증(漸增)되어 가면 마침내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행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지다.’가 신심명의 73게송 중 최상의 법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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