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앞 게송 66)에서 극히 작은 것이 극히 큰 것과 같다고 하여 극소동대(極小同大)라 하고, 67)에서 극히 큰 것은 극히 작은 것과 같다고 하여 극대동소(極大同小)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거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무(無)’라고 할 수 있고, 지극히 큰 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유(有)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에서 극소(極小)는 곧 극대(極大)이고, 극대동소(極大同小)에서 극대(極大)는 곧 극소(極小)라고 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극소(極小)를 무(無)로 바꾸어 놓으면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여 같은 뜻을 색(色)과 공(空)으로 설하고 있다.


그 동안에 스님은 ‘지혜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해왔다. 우리들의 심성(心性)에는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심상(心相)이 있는데 그 심상은 사람의 습성(習性)에 의해 형성된 마음의 상이다. 이 심상은 자기의 습성에 의해 애정이나 사물을 보는 줄을 알지 못하고 하는 행위에 의해 현실과 괴리(乖離)가 생기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고, 또 이것이 불행과 불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려왔다. 이 논리에 의하면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봤다고는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오인(誤認)이었던 것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의 심상(心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니 심상을 청정히 하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오늘 이 게송에서는 유(有)를 무(無)로, 무(無)를 유(有)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하는데 이 지혜가 있어야 함을 설하고 있다. 즉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볼 수 있는 지혜보다 무척 높은 단수라고 할 수 있다.

유무(有無)의 이론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 정의(定意)된다. 어떠한 존재도 무엇과 인연(因緣)되지 아니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가 무(無)의 논리이고, 인연이 시작되기 전(前)이나 인연이 다해 인연들이 모두 흩어진 상태를 무(無)라고 했다. 그리고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무엇인가 생성(生成)되는 이치가 유(有)의 논리이다. 또 유(有)에서 무(無)를 그리고 무에서 유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지혜라고 하는데 반야경에서는 이를 반야(般若)라고 했다.

어떠한 사물(事物)이나 애정(愛情), 고통이나 어려움도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연을 따라 추적(追跡)해 보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고, 그 구경(究竟)의 원인은 물질적인 요소가 아닌 공(空)한 것이고 무(無)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무(無)에서 인연들을 다시 모아 결합하면 반드시 새로운 사물이나 애정, 혹은 고통 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하기에 유(有)를 보면서 그 유를 이루게 된 연을 볼 때 연들은 그 유가 아니고, 연(緣)들이 요소로 있을 때는 무이나 이들이 결집될 때는 유(有)가 되는 것이니 무가 무 아닌 이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 앞에 한 컵이 있으니 이 컵은 유(有)이다. 이 유를 유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이 컵이 어떤 사람의 의욕과 기술에 의해서 어떠한 재료로 어떠한 공정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그 재료는 물질이지만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면 그도 공(空)해지고 무(無)가 되는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을 유(有)에서 무(無)를 보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또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기공(技工)이 어떤 재료를 모아 일정한 공정을 거쳐 상품(商品)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한다면 이 사람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니, 이 사람은 무에서 유를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가 불교의 근본사상임을 잘 알아서 무에서 유를 만들기도 하고, 필요 없는 유를 무로 만들어서 그 무를 다시 유로 창조해 재활용(再活用)하는 활동이 일상생활상에서 능수능란(能手能爛)하게 할 수 있음으로서 비로소 불교를 생활화하는 불자(佛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등 모든 무(無) 자 돌림은 유에서 유를 이루게 된 연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면 무만이 남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것도 그들의 인연이 영원한 것은 없으니 집착을 하지 말라. 집착을 하면 곧 괴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것도 연의 이치를 따라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법칙이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필요에 응해 해체할 수도 있고 생기(生起)할 수도 있다는 진리다.

그리고 대도(大道)인 극락(極樂)은 유(有)에도 무(無)에도 공히 존재하는 것이니 유무(有無)를 관철하기도 하고 가능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힘이다. 극락의 이치가 이러하니 극락은 있고 없음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지만, 없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극빈(極貧)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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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심명 해설(전문) Bultasa 2009.03.02 12345